이창용 취임 이후 보고서 쏟아내
최저임금 차등엔 ‘경제학’ 관점만
일각선 ‘정부 논리 방어용’ 의구심
총재 직함에 걸맞게 독립성 지켜야
오래전 경제부처를 담당할 때마다 들었던 말이 있다. “한국은행은 그 수많은 보고서를 캐비닛에만 넣어두고 대체 뭐해요?” 각각 다른 부처 공무원에게 들은 말이다. 한은에는 ‘한은사’가 있다는 말도 있다. 특별히 시끌벅적한 일이 없고 조용한 절간 같다는 농담이 섞인 별명이다. 근저에는 ‘고급 인력’을 두고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깔려 있다.
‘그랬던’ 한은이 요즘 달라졌다. 먼지 쌓인 수많은 보고서가 ‘빛’을 보고 있다. 요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 화제가 된 보고서가 많다. ‘부족한 돌봄 도우미, 외국인 비자 허용하고 최저임금 차등적용’ ‘지역의 거점도시 위주로 성장 전략을 짜야 수도권 팽창 견제 가능’ ‘연봉보다 근무여건이 더 중요하고, 여성이 더 근무여건 중시’ 등 통화정책에 관한 내용을 넘어 한국사회 전체를 향하는 메시지가 담긴 보고서들이다. 보고서 이외에 이창용 한은 총재가 기자회견에서 ‘사과 수입’을 제안해 파장이 일기도 했다. 형식에도 힘을 쏟는다. 발표 연습을 하고, 브리핑을 끝낸 후 취재기자들에게 설문조사를 해 피드백도 받는다.
요약하자면 ‘시끌벅적’이다. 이는 지난달 취임 2주년을 맞은 이창용 총재가 가져온 변화다. 이 총재는 사회적으로 이슈가 될 보고서를 만들라고 주문하고, 발표도 작성자가 직접 하도록 요구한다고 한다. 한은을 싱크탱크로 만들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이슈를 제기하고, 소통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에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최근 한은의 행보를 보면, 경제와 자본의 논리만 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대부분의 사회문제가 경제학적 해결책으로 단박에 해소될 수 있는 게 아님에도 한은 보고서의 시야는 경제학적 논리에만 머물러 있다. 대표적 예가 ‘외국인 도우미의 최저임금 차등적용’ 보고서다. 한은은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연구기관이 아닌 정부로부터 독립된 기관이다. 그렇기에 사회의 다른 목소리까지 담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오직 경제학 논리만 담은 주장은 ‘반쪽 보고서’일 수밖에 없다. 반쪽짜리에 지속적 신뢰를 보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우스갯소리지만 오죽하면 전혀 다른 내용의 브리핑을 들은 후 한 기자가 “대책이 뭔가요? 이번에도 수입하나요?”라고 물었을까.
혹여 한은이 정부의 방향에 맞게 ‘요리’된 보고서를 내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운 시선도 나온다. 한은의 ‘외국인 가사도우미’ 보고서가 나온 뒤 정부 관계자들은 너도나도 이에 호응했다. 기획재정부 장관, 금융위원장, 금융감독원장과 함께 만나는 이른바 ‘F4’ 회동에 한은 총재가 정례적으로 참석하는 걸 보면서 우려는 더해진다. 한은 내부에서는 왜 자꾸 정부 논리를 방어해주려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한은의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이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장관에서 한은 총재로 바뀐 건 1997년 12월 한은법 개정 이후다. 이후 한은의 역사는 독립성을 지키기 위한 분투였다. 지금은 독립성이 지켜진다는 평가를 받지만 휘둘리고 휘말리는 건 순간이다.
지난 4월 총선 딱 한 달 전인 3월11일 김은혜 국민의힘(경기 분당을) 후보의 SNS 계정에 이 총재가 등장했다. ‘기준금리는 DOWN! 분당 재건축은 UP!’ 문구와 함께 김 후보와 이 총재가 한은 총재실에서 악수하는 사진이었다. 김 후보는 대통령실 전 홍보수석이었다. 이명박 정부 시절 이 총재는 금융위 부위원장, 김 후보는 청와대 부대변인이었다. 사적 인연이 공적으로도 이용된 것이다. 중앙은행 총재가 선거 목전에 기준금리 인하를 말하는 출마 예정자와 웃으며 악수하는 사진은 한은의 독립성과 중립성에 분명 마이너스다.
한은을 거쳐간 인사들에게 최근 한은에 대해 물었다. 한은의 전 고위 관계자는 “최저임금 차등 적용에는 반대하지만 과거에 보편타당한 결론을 내리려고 좌고우면하다 아무것도 안 했던 때보다는 낫다”며 “조용한 한은에 그 정도의 소란함은 필요하다”고도 말했다. 나는 한은이 ‘소란’한 데 그치지 않고 조화로운 오케스트라 선율로 거듭나길 바란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이 총재다. 2024년에 ‘총재’라는 직함을 쓰는 곳은 KBO(한국야구위원회) 이외에 한은뿐이다. 직함조차 ‘총재’인 이 총재의 책임이 그래서 더 막중하다. 그가 일말의 우려를 기우로 만들고, 어디로부터도 휘둘리지 않고 한은을 싱크탱크로 변모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지휘자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