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갤럽 조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20%대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하였다. 불통이 종종 그 원인으로 지목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부분은 외교·안보 분야가 긍정 평가 30% 비율로 높은 축에 속한다는 것이다. 총선 참패 직후 윤 대통령은 국정 쇄신을 언급했지만, 외교·안보 분야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분야는 전환이나 인사를 쇄신할 어떠한 필요성도 느끼지 못할 만큼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윤석열 정부는 그간 보수가 염원해 온 한·미 동맹과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를 그 어느 정부보다 더 제고하였다. 중국과 러시아에 대해선 갈등과 충돌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는 기존 정부들의 대외정책이 지닌 미묘한 금기들을 과감히 깬 것이다.
외교는 폭풍의 바다에서 배를 뒤집을 수도 있고, 쾌속항해를 하게 할 수도 있다. 관찰컨대, 여야 정치지도자들에게 외교·안보 분야는 쉬운 영역이자 무시해도 되는 분야로 보인다. 이 분야는 총선이나 대선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김대중 대통령 이후 거의 모든 대통령은 이 분야에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대소 실책이나 무지에도 불구하고, 결국 미국에 의존하기만 하면 되는 만병통치약이 있었다. 외교·안보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영역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이 분야에서 검증도 채 받기 전에 전문성과 자질보다는 충성도와 친밀도가 역대 정권의 인재 선발 기준이 되었다. 그간 북한 혐오와 한·미 동맹 강화를 소리 높여 외칠수록 보수의 아이콘이 될 수 있었다. 최근엔 중국 때리기가 그 리트머스 테스트지 역할을 한다.
미국에 의탁한 윤석열표 외교
근대적 국제정치는 그 구조가 아나키, 즉 혼돈이라 불리는 영역이다. 주권국가에 대한 상위의 심판자가 없고, 각자는 스스로 선(善)이다. 철저히 자국의 이익을 따진다. 강대국일수록 더 집요하다. 국제정치에서 선과 악의 궁극적인 심판 수단은 전쟁이다. 생존을 위해 강대국은 강대국스럽고, 약소국은 약소국다워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나마 자유주의 기치를 표방한 미국 덕에 안정과 규범에 입각한 국제질서를 실험하였다. 그리고 국가를 넘어선 탈근대적 복합질서를 모색하였다. 한국은 이 무대에서 성공적인 연기자였다. 그러나 미·중 전략경쟁의 시기 미국 스스로 여유를 잃었다. 제이크 설리번이 잘 지적했듯이 자국의 내적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해졌다. 미국에 철저히 편승하면서 강대국의 언어를 거침없이 내뱉은 윤석열표 ‘가치외교’는 이제 당혹감을 넘어 위기다.
윤석열 정부는 바이든 행정부의 양대 진영론을 적극 수용하였다. 권위주의 체제인 중국과 러시아는 모두 미국과 적대적 모순관계로 상정한다. 그러나 현 질서는 냉전으로만 설명하기에는 너무 복합적이다. 게다가 급격히 진화·변환 중이다. 냉전적 세계관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한 곳이 한반도이다. 북한은 현 질서를 공식적으로 신냉전이라 규정하였다. 윤석열 정부는 실제 외교원칙으로 가장 적극적으로 적용하였다. 그 덕에 북한은 핵미사일 개발에 대한 안보리의 압박을 벗어났고, 러시아라는 강력한 경제적 후견인을 얻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은 민주진영의 최전선에서 깃발만 나부끼면서 고독히 선 돌격대의 양상이다. 북·러를 긴밀히 결합하게 한 것은 뼈아프다. 일본은 윤석열 정부를 지원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일본은 탈윤석열, 탈한국을 모두 염두에 두고 있다. 중·러와는 최악의 상황으로 점점 커질 비용을 걱정해야 한다. 윤석열 정부는 대중 및 대북 정책을 놓고 미국 바이든 정부와도 점차 미묘한 긴장이 커지고 있다. 한·미 동맹은 굳건하다는 윤 대통령의 목소리는 어쩐지 공허하고, 절박한 위기의식은 없어 보인다.
미국은 더 이상 가치나 이념을 강조한 외교를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기엔 미·중 전략경쟁에서 중간지대로서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의 향배가 중요하고, 세계화된 국가 간 관계는 적대적 모순보다는 비적대적 모순으로 협력이 필요한 영역으로 가득 차 있다. 바이든 정부 내 분위기는 중국은 물론 북한과도 대화할 수 있다는 태도로 전환하고 있다. 중·러관계는 더욱 미묘하다. 러시아는 북한, 베트남, 인도와의 관계에 공들이고 있다. 중국에는 모두 아킬레스건이다. 미국이 북한을 포함한 이들과 연대할 수 있다면 미국의 중국에 대한 전략적 공간은 가장 커진다. 미국의 전략은 변화 중이다. 일본도 발 빠르게 북한과 접촉 중이다.
구한말 고종의 뒤 밟을 텐가
‘글로벌 중추국가’라는 거창한 슬로건과 달리, 궁극적 승자가 될 것이라 믿은 미국에 전적으로 의탁하는 전형적 약소국 외교를 택한 윤석열표 외교는 3중 편중성으로 스스로의 발목을 묶었다. 첫째는 미국에 대한 편중성이다. 그러나 미국의 일방적 승리는 불가능하다. 둘째는 안보에 대한 편중성이다. 경제는 이제 안보다. 셋째는 가치·이념에 대한 편중성이다. 이는 결국 수단에 불과하다. 윤석열 정부는 근대적·과거의존적인 외교전략에 집착한 나머지 탈근대적이고 복합적인 변화에 대한 이해를 놓치고, 경직되어 있다. 위기도 여전히 크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대로라면, 보다 유연한 정책을 채택하려는 바이든 정부와의 엇박자는 강화될 것이다. 만약 트럼프가 거래주의적 관점에서 외교를 추진한다면, 한국은 자율성이 부재한 가운데 그 높은 비용을 고스란히 다 치러야 할 판이다. 한·미 동맹은 절대선이라 변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새로운 복합 경제·안보·외교 시대에 대처하기 위해 기존 보수의 구태의연하고 무지각적인 해법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눈과 귀를 열고 명민하게 시세의 변화를 살피고, 여야, 보수와 진보 모두의 지혜를 모으고, 최상의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대처해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보수의 질과 건강성이 그 나라의 운명을 좌우한다. 보수는 그 나라의 운명을 지켜내는 근본이다. 진보는 그 나라의 미래에 희망을 던져주는 동력이다. 근본이 흔들리고, 동력이 무능하다면, 그 나라는 암담하다. 국민들은 누가 권력을 잡는가보다는 나라의 근간을 바로 세우고, 미래에 대한 비전과 희망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여야가 모두 권력욕에만 집착한다면 구한말 고종의 뒤를 밟지 말라는 법이 없다. 오호통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