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책을 만드는 시기엔 꿈에 꼭 편집자가 등장한다. 꿈속에서 편집자는 휴양지로 도망친 나를 기어코 찾아내거나(도대체 어떻게 알고 오셨을까) 별 수확이 없을 게 뻔한 나의 텃밭을 둘러보며 해결책을 강구하고(마냥 송구스럽다) 혹은 별말 없이 내 책상 근처에 앉아 그저 커피를 홀짝이곤 한다(이 경우가 가장 신경 쓰인다). 무의식에서도 편집자가 보일 만큼 출간 과정 내내 그를 의식하며 지내는 것이다. 문학 편집자로 일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신뢰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글을 읽고 돌려주는 피드백에는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데뷔 전부터 나는 여러 편집자들 근처를 맴돌았다. 무수한 작가들의 팬인 만큼 여러 편집자들에 관해서도 팬이 되고 말았다. 책을 읽다보면 본문은 물론이고 편집과 디자인과 제작 등 모든 세부사항에 반할 만한 작품을 종종 만나는데 그러면 어김없이 맨 뒷장의 판권면을 살펴보고 싶어진다. 어쩌면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영화관에 앉아 있는 시네필들의 마음과도 비슷할 듯하다. 판권면의 책임 편집란에는 이 책을 담당한 편집자의 이름이 작게 적혀 있다. 책이 소중한 만큼 그 이름도 소중해지고, 좋아하는 영화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외우듯이 특정 편집자가 만든 책의 목록을 외우며 그를 좋아하게 된다. 서점의 도서 검색란에 저자, 책 제목, 출판사뿐 아니라 편집자와 디자이너, 마케터와 같은 출판노동자의 이름을 넣어보는 상상을 한다. 이들의 작업 역사를 더 수월하게 좇고 싶어서다. 편집자를 믿으므로 책을 사는 독자도 있을 테니까.
출간이라는 협업
어렸을 때 장래 희망을 적으며 상상했던 작가는 주로 혼자인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책을 한 권만 만들어봐도 얼마나 많은 전문가가 이 일에 참여하는지 알게 된다. 집필과 출간을 둘러싼 북적임에 관해 더없이 잘 다룬 작품은 이달 초 완결된 마츠다 나오코의 만화 <중쇄를 찍자>다. 만화 잡지 편집부가 배경이지만 문학 출판 편집부와도 닮은 점이 많다. 이렇게까지 책을 만드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역시 만화는 과장된 데가 많다고 누군가는 말하겠지만 나는 알고 있다. 정말로 이렇게 일하는 동료들을. 주인공 쿠로사와처럼 열과 성을 다해 원고를 보고 더 좋아질 수 있는 부분을 짚어내는, 퇴근 후에도 책 생각을 하는 것이 분명한 사람들이 출판계엔 수두룩하다.
물론 나는 이들과 때때로 충돌한다. 우리를 갈등하게 할 항목들은 아주 많다. 책 제목과 표지 디자인, 띠지 삽입 여부뿐 아니라 본문 여백과 가름끈 색깔, 그리고 0.5포인트의 글자 크기 가지고도 의견이 엇갈린다. 이 책을 끝으로 다시는 상종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작가와 편집자들을 쉬이 그려볼 수 있다. 하지만 책의 디테일에 이만큼 집착하는 인구는 애초에 아주 소수다. 여러 고생 속에서도 언제나 편집자들과의 대화로 돌아가고 싶어지는 건 이들의 독특한 전문성을 몹시 아끼기 때문일 것이다. 편집자 때문에 글이 시작되는 순간도 잦다. 그와 다시 일하고 싶으니까. 그러려면 우리 사이에 양질의 원고가 있어야 한다. 물론 원고 없이도 밥을 먹고 차를 마실 수 있겠으나 그것은 최고의 만남이 아니다. 양질의 원고가 있어야만 그와 나의 관계는 최대로 발휘된다.
만나고 싶다면 좋은 글을 쓸 것
그러나 365일 좋은 원고를 써내는 작가는 드물다. 편집자와 나의 관계에 어쩔 수 없이 성수기와 비수기가 있다는 의미다. 편집자가 나 아닌 작가들의 뛰어난 책에 몰두하는 동안 나는 미련 남은 전 연인처럼 문자 보내지 말고 그저 새 작품을 써야 한다. <중쇄를 찍자> 속 스승 미쿠라야마는 말했다.
“작품에는 살면서 본 것들이 전부 드러나는 법일세. (…) 기뻐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고서 기쁨에 찬 얼굴을 그릴 수 있을까? 반드시 봐야 해, 만화가는. 철저하게! 흥미가 없는 일이나 사물이라도 똑바로 보고, 자기 나름대로 생각해야 해. 봐온 것들이 전부 눈에서 머리로, 머리에서 마음으로, 마음을 통해 손에서 원고로 흘러나오는 법이거든.”
편집자들의 노동이 눈에 선해지게 된 시기는 내가 출판사를 직접 운영한 이후부터다. 그들이 하는 일을 주먹구구식으로나마 직접 해보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징하게 어렵고 아름다운 기술인지를. 출간을 해보기 전엔 보이지 않았던 수고로 가득했다.
판매와 존엄을 따로 놀게 하지 않는 편집자들에게 나는 최선의 원고를 보내려고 애쓴다. 그럼 편집자는 내 글을 본다. 그냥 보지 않고 열과 성을 다해 본다. 그 순간부터 이미 책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의 것이다.
저자가 직접 할 수 없는 온갖 노동으로 책의 앞뒤를 책임지는 출판노동자의 하루 하루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이 작가의 의무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