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플 것 같아요

변재원 작가

얼마 전, 한 중학교에서 장애인 인권교육 강의를 마친 뒤 질문 시간에 한 여학생이 나에게 장애인이 되어 억울하냐고 물어보았다. 정확히는 의사의 과실로 인한 의료사고로 장애인이 된 게 원망스럽냐는 질문이었다.

질문한 학생을 보며 말했다. 처음에는 원망스럽지 않다가, 언젠가 문득 원망스러웠다가, 이내 다시 원망스럽지 않게 되었다고. 연이은 수술을 거치며 줄곧 병실에 누워 있던 유아기부터 청소년기까지 삶은 힘겨웠지만, 이상하게도 의사를 원망한 적은 없었다. 장애, 마비, 질병을 감내하는 시간 자체는 나에게 원망으로 기억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문득 스무 살 성인이 되어 대학에 가고, 처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스스로 거울을 보다 내 몸이 아름답게 대상화될 수 없는 ‘작고 휘고 취약한 매력 없는 몸’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오랜 시간 미뤄두었던 원망스러움이 솟아났다. ‘나도 멋진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런 생각이 내내 들다가, 결국 장애를 갖게 된 지 20년 만에 의료사고를 냈던 의사의 이름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인터넷 검색을 이어간 끝에 발견한 것은 그가 현재 재직 중인 병원의 소재가 아니라, 그의 부고 소식이었다. 정확히는 그의 아내가 블로그에 남긴 그에 대한 회고였다. 남편은 좋은 의사였으며, 클래식 음악을 사랑했고, 마음이 여유롭고, 가족에게 잘했으며, 환자들에게 친절했다는 내용이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아프게 만든 사람을 아름답게 기억하는 글을 보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요?”

체육관에 모인 400명 가까운 학생들은 서로 다른 소리로 얘기했다. 속이 터질 것 같다는 사람, 화가 날 것 같다는 사람, 댓글을 달 거라는 사람. 그러다 저기 어디선가 어떤 여학생이 이렇게 말했다. “슬플 것 같아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맞다고. 슬펐다고. 나는 속이 터지지도, 화가 나지도, 댓글을 달지도 않았고. 이상하게도 그 순간 슬픈 마음이 들었다고. ‘나를 이렇게 만든 한 사람의 시대가 끝났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그 또한 그의 가족에게는 좋은 아빠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래서 더 이상 원망하지 않게 되었다고.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나도 여러 번 실수를 저질렀다. 다만 내 실수는 아직 타인의 신체에 손상을 입히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지만 생후 100일에 나를 대했던 의사의 경우는 달랐다. 그의 실수는 나의 장애로 귀결되었다. 고의 없는 실수였을 것이다. 다만 그의 특수한 직업에서 비롯한 실수이기에 뼈저린 아픔을 만들었을 뿐이다.

30년이 더 지난 지금 나는 그의 실수를 용서했다. 더 이상 내가 경험한 의료사고가 억울하거나 원망스럽게 기억되지 않는다.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났기에 다시 만날 일 없지만, 10여년 전에 그를 그리워하며 추모하는 메모를 남긴 의사의 사모님을 만나도 진심 어린 마음으로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애도를 건넬 수 있을 만큼 그를 용서했다. 지금 이 모든 일들은 누구도 원치 않았던 실수의 결과였으리라.

결국 이야기가 돌고 돌아, 질문을 준 그 학생에게도 그가 아마 실수했기 때문에 그랬으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슬프지만, 실수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거니까.

변재원 작가

변재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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