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담론이 아니라 평화담론이 절실하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얼마 전 통일 관련 토론회에 참가했다가 한 패널로부터 “역대 진보정부에서는 왜 통일담론을 얘기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요즈음 윤석열 정부가 ‘새로운 통일담론’을 만든다고 분주한데, 이와 맥을 같이하는 질문이었다. 나는 아주 상식적이고 뻔한 답을 했다.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는 통일을 지향했지만, 남북 간 적대와 대결 상태 속에서 당장 시급한 것은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하는 일이라고 보고 평화정책에 집중했다. 우리가 평화라는 강을 건너지 않고 통일로 나아갈 수 없기에 역대 진보정부는 통일이 아니라 평화담론 개발에 매진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3·1절 기념사에서 “자유로운 통일 한반도”를 주창하면서 “북한 정권의 폭정과 인권유린은 인류 보편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라며 통일을 “자유와 인권이라는 보편의 가치를 확장하는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통일부는 이 언명을 지침으로 하여 “자유와 인권의 보편가치”를 핵심 내용으로 담은 ‘새 통일담론’을 형성하겠다고 나섰다.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정부가 ‘새로운 통일담론’을 만들겠다는 의지 자체에 대해 무어라고 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극단적인 남북 대결로 인해 국민이 전쟁을 걱정하는 상황에서, 그동안 위기를 극복할 평화정책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으면서, 대신에 대대적으로 새로운 ‘통일담론’을 운운하니 일의 순서가 거꾸로 되었다.

지금 정부가 우선 매진해야 할 과제는 남북 대결을 종식하고 우리 국민을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할 방법을 찾는 일이다. 이를 위해 남북 간 협력은 차치하더라도 최소한 대화와 협상을 위한 노력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것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정부의 자세이다. 바로 이러한 노력 위에서 통일담론 형성에 나선다면 무어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지금처럼 평화라는 선행과제에는 손도 못 대면서 뜬구름 잡듯이 통일담론 형성에만 열중하는 모습은 정상이 아니다.

새로운 통일담론이 시급하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우리는 이미 진보·보수 막론하고 지난 30년간 지켜온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방안은 김영삼 정부가 노태우 정부의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계승·보완하여 1994년에 만들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통일론 선구자로서 오래전부터 독자적인 3단계 통일론을 주창해왔지만 취임 뒤 자신의 방안과 명칭을 고집하지 않고 보수정권이 만든 이 방안을 과감하게 계승하였다. 이처럼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보수·진보가 합의한 범국민적 방안으로서 의미가 매우 크다. 그 내용도 실용적이다. 이 방안은 자주, 평화, 민주의 원칙 아래 화해협력 → 남북연합 → 통일국가라는 3단계 통일과정을 핵심 내용으로 한다. 사실상 두 개의 국가가 존립하는 현실을 인정한 위에 우선 화해협력을 실현한 후 점진적 통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최근 북한이 남북관계를 ‘가장 적대적인 두 개의 국가’로 규정하자, 일부에선 그에 대처해 새로운 통일방안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유지하면서 장기적으로 변화한 상황을 반영하여 부분 보완해 나가면 될 일이다. 영구분단을 의미하는 북한의 ‘두 개의 국가’ 주장에 대해선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이 제시하듯 우리가 남북 간 이질성을 고려하여 3단계 통일과정을 설정하고 장기적 통일을 지향해왔기에, 우리 사회가 받는 충격은 크지 않다. 우리가 북한의 주장을 주시해야 하지만,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 사실 현재의 적대적 남북 대결 상황에서 영구분단국가로서 ‘두 개의 국가’ 여부가 판가름 나는 것은 먼 미래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가 충분한 숙의를 통해 장기적으로 입장을 정립하고, 그에 바탕을 두고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수정 여부를 결정해도 늦지 않다. 오히려 지금 시급히 대처해야 하는 것은 ‘가장 적대적인’이라는 규정이다. 이는 우리 삶을 위협하는 반평화 선언으로 이에 대처하는 평화정책이 절실하다.

지금은 남북 대결로 불안해진 국민 삶을 안정시키고 어려운 경제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가장 적대적인’ 남북관계를 ‘평화적인’ 관계로 바꾸기 위한 정부 노력이 절실한 때다. 남북관계가 악화하고 한반도 정세가 위기에 처한 것은 통일담론이 부족하거나 기존 통일담론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 현 정부 들어 한반도 평화라는 말이 사라지다시피 한 데서 보듯, 정부의 평화에 대한 의지와 노력이 부족한 게 가장 큰 원인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통일담론이 아니라 실천이 담보된 진지한 평화담론인 것이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Today`s HOT
미국의 어느 화창한 날 일상의 모습 마이애미 비치에서 선보인 아트 전시회 폭스바겐 노동자들의 파업 집회 베이징 스피드 스케이팅 우승 나라, 네덜란드 팀
크리스마스 모형과 불빛을 준비하는 도시의 풍경 할리우드 섹션에서 인도주의자 상을 수상한 마리오 로페스
훈련을 준비하는 프랑스 해군들 중국에서 홍콩으로 데뷔한 자이언트 판다 '안안'
프랑스-나이지리아 회담 루마니아 국회의원 선거 그리스를 휩쓴 폭풍 '보라' 추위도 잊게 만드는 풋볼 경기 팬들과 작업자들의 열정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