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준의 옆집물리학]아지랑이

요즘 날씨가 참 좋다. 춥지도 덥지도 않아 1년 365일 이런 날씨가 계속 이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따사로운 늦봄이다.

어린 시절 봄은 어머니의 냉잇국으로 시작해 가려운 눈가와 재채기를 지나 시원한 열무국수로 끝났다. 요즘에는 자동차 에어컨을 켜면서 봄이 여름으로 바뀌는 계절의 변화를 불현듯 깨닫기도 한다. 햇볕으로 뜨거워진 차 안에서 어느 날 에어컨을 켜기 시작할 무렵이면 또 다른 초여름의 낯익은 풍경이 있다. 자동차 앞 유리 너머 거리의 풍경이 아른거린다. 햇볕으로 뜨거워진 도로와 앞차 지붕에서 아지랑이가 꼼지락꼼지락 피어오른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투명한 공기도 엄연히 존재하는 물질이다. 물리학에서 빛이 지나는 매질의 굴절률은 진공에서의 빛의 속도를 매질 안에서의 빛의 속도로 나눈 값이다. 진공의 굴절률은 1이고 진공에서 빛이 가장 빨라 어떤 매질이라도 굴절률이 1보다 작을 수 없다. 굴절률은 매질 안 빛의 속도에 반비례하므로 굴절률이 작은 매질에서 굴절률이 큰 매질로 진행하면 빛의 속도가 줄어든다.

물리학의 페르마의 원리에 따르면 빛은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의 시간이 최소가 되는 경로로 나아간다. 어린 시절 거리에서 팔던 달달한 반투명 냉차에 담긴 숟가락이 휘어져 보였던 것도 페르마의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 빛은 굴절률이 작아서 빠르게 나아갈 수 있는 공기 중의 경로의 길이는 늘리고 굴절률이 공기보다 큰 냉차 안 경로의 길이는 줄여서 전체 소요된 시간을 최소로 하고, 이로 인해 빛은 공기와 냉차의 경계에서 경로가 꺾인다. 그렇게 꺾여야 전체 소요시간이 최소가 된다. 돋보기로 햇빛을 모아 까만 먹지에 불붙이는 어릴 적 장난도 기억난다. 이것도 페르마의 원리와 관련된다. 돋보기 볼록렌즈의 가운데 부분은 두꺼워서 그곳을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직선을 따라 통과한 빛은 거리는 짧아도 긴 시간을 여행해 초점에 도착한다. 한편 돋보기 둘레의 얇은 부분을 통과한 빛은 더 먼 거리를 진행해 초점에 도착하지만 소요되는 시간은 렌즈의 가운데를 직진해 통과한 빛과 같다. 돋보기 초점에 많은 햇빛이 모이는 이유는 여러 다른 경로를 거친 빛살의 진행 거리는 제각각 달라도 초점까지 하나같이 같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밝은 햇살의 많은 빛알은 정확히 같은 시간을 여행해 동시에 초점에 도착한다.

공기의 굴절률은 밀도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온도가 높아지면 공기의 밀도가 줄어든다. 햇볕으로 뜨거워진 도로 위 공기는 밀도가 작아 위로 오르면서 공기의 굴절률이 균일하지 않게 되고, 멀리서 다가와 대기를 통과하는 빛의 경로를 교란해 아지랑이를 만든다. 초여름 한낮 아지랑이의 물리학은 밤에 별빛의 깜박임을 만들어내는 원리와 같다. 우리 머리 위 상공 대기의 움직임으로 저 먼 우주에서 우리에게 다가온 별빛이 어른거리며 깜박임을 만든다.

여름날 멀리 뻗은 직진 도로를 가만히 바라보면 다가오는 자동차가 마치 그 아래에 물이 있듯이 반사되어 거꾸로 뒤집힌 모습으로 보인다. 이런 신기루 현상도 페르마의 원리로 만들어진다. 도로 바로 위는 온도가 높아 공기의 밀도가 작고 따라서 굴절률도 작아서 빛이 그곳을 통과할 때 짧은 시간이 걸린다.

저 멀리 똑바로 선 나무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나무 꼭대기에서 출발한 빛은 똑바로 직진해 내 눈에 들어올 수도, 도로 위 뜨거운 공기를 통과해 올 수도 있다. 나무 꼭대기에서 똑바로 직진한 빛은 거리는 짧아도 온도가 조금 낮아 굴절률이 조금 큰 공기의 영역을 조금 느리게 통과하고, 나무 꼭대기에서 도로 바로 위를 거쳐 아래로 휜 경로로 진행한 빛은 조금 먼 거리를 우회하지만 통과한 대기의 온도가 높아 굴절률이 조금 더 작아 더 빠른 속도로 진행한다. 결국 내 눈에는 나무 꼭대기에서 출발한 서로 다른 두 경로의 빛이 동시에 도착한다. 똑바로 선 나무는 지면 근처 뜨거운 공기층을 통과해 내 눈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위아래 모습이 뒤집힌다. 거꾸로 아래의 온도가 낮고 위의 온도가 높으면 물체가 뒤집히지 않은 모습으로 공중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꼼지락 아지랑이의 시각적 효과인지 나는 봄날 자꾸 졸음이 온다. 어질어질 피어오르는 늦봄 오후의 아지랑이를 보면 숨 가쁜 세상 잊고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 낮잠 한번 늘어지게 자고 싶어진다. 곧 여름이다. 달게 자고 일어나 깍두기 반찬에 찬물에 만 밥 한 그릇을 후루룩 뚝딱한 어린 시절 추억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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