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임된 권력의 남용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1630년 음력 4월14일, 예안현(현 경북 안동시 예안면 일대) 향청에서 지역 향교와 서원을 통해 예안 유림들을 모았다. 현내 여러 문제들을 논의하자는 게 의제였는데, 참으로 뜬금없는 의제였다. 본래 현내 복잡한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닌 데다 그 문제들이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예안현 대다수 유림들은 당시 예안현 내에 돌고 있는 예안현감에 대한 소문이 중요 의제가 아닐까 짐작했다.

그러나 예안 유림들의 추측은 빗나갔다. 예안현감은 당해 연도 전세(田稅)를 어떻게 거둘지, 그리고 이를 위한 양전(토지 측량)은 어떻게 할지 논의한 후, 서둘러 향회를 끝냈다. 지역 유림의 자치 조직인 향회 특성상 당시 문제되고 있었던 예안현감의 소문에 대해 성토할 수도 있었지만, 예안현감 편에 선 향회 우두머리인 좌수가 나서서 이를 막고 의제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감의 당시 소문에 대한 사과나 입장표명을 기대했던 유림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이 당시 예안현 내에서 떠돌고 있는 소문대로라면 예안현감의 권력 남용은 심각하기 이를 데 없었다. 현감이 그렇게 행동했던 이유에 대해 납득할 만한 해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지역 유림들이 나서 조정에 탄핵이라도 해야 할 사안이었다.

이 일의 시작은 향회가 열리기 사흘 전인 음력 4월11일. 당시 예안현에는 시장을 돌면서 소를 훔친 도둑이 잡혀 관아에 고발되었다. 현감이 직접 나서 심문해보니, 소도둑은 상습범으로 이미 서너 곳의 소를 훔친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시대 절도는 중범이었고, 특히 상습 절도행위는 경우에 따라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다. 당연히 경상감영에 보고하고, 그에 대한 처결을 진행하는 게 옳은 절차였다. 그런데 이 과정이 소도둑의 진술로 멈췄다. 그가 심문 과정에서 자신을 당시 이조판서였던 정경세의 종이라 둘러댔기 때문이다. 물론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정경세가 누군가! 그는 류성룡의 상주 지역 제자로, 영남 유림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지역에서의 명망도 명망이었지만, 전체 문관 인사를 총괄하는 이조의 수장이었으니 그 이름만으로 6품의 예안현감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신분의 진위 확인이 우선이었지만, 예안현감은 정경세라는 이름만으로 충분히 주눅 들었다.

결국 예안현감은 곤장 몇대로 서둘러 심문을 마무리했고, 경상감영에는 보고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도둑이 풀려났다는 소문이 예안현 내에 퍼졌다. 예안현감이 눈치를 살피던 차에 소도둑이 귀한 보물을 뇌물로 바쳤기 때문이라는 말도 흘러나왔다. 이 와중에 예안현감은 소도둑이 소를 훔쳤다는 사실을 무마하기 위해 훔친 소를 맡겨둔 민가를 찾아 베 15필을 주고 소를 사들였다. 베 15필을 소도둑과 소를 맡아준 장물아비에게 지불한 꼴인데, 이렇게 되니 소를 도둑맞은 사람은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할 곳이 없어졌다. 확인되지 않은 권력 앞에서 비굴해진 결과였다. (출전 : 김령 <계암일록>)

예안현감의 권력은 소도둑을 잡아서 처벌하라고 주어진 권력이지, 자신의 비위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막으라고 주어진 권력이 아니었다. 소도둑은 풀어주고, 그 사실을 비판하는 입을 틀어막는 데 사용해도 되는 권력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권력이 더 높은 권력만을 바라보고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잘못 행사할 때, 피해를 보는 것은 권력의 보호를 받아야 할 백성들뿐이다. 이제 많은 예안 유림들이 선택할 다음 행동은 예안현감의 파직을 청하는 일밖에 없었다. 권력은 주어진 범위 안에서 올바르게 행사될 때만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예안현감은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민에 의해 위임된 권력이 국민들을 위해 그 권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언제라도 국민들에 의해 그 권력이 거두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우리 시대 권력처럼 말이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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