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최근 나는 이 질문에 사로잡혀 있다.
시작은 BBC 다큐멘터리 <버닝썬 - K팝 스타들의 비밀 대화방을 폭로한 여성들의 이야기>였다. 다큐는 일군의 남성 K팝 스타들이 여성을 강간하고, 불법 촬영물을 돌려보며, 심지어 성상납을 했던 사건이 밝혀질 때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바로 이 다큐에 ‘용기’라는 단어가 나온다. 2019년 버닝썬 관련 단톡방을 처음으로 기사화했던 강경윤 SBS 기자의 인터뷰 내용에서다.
강 기자는 경찰유착, 성폭행, 불법촬영 등 총체적인 범죄 정황이 기록되어 있던 단톡방 내용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난관에 봉착한다. 대화에 언급되는 고위 경찰의 실체를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 고리를 풀어준 사람이 고(故) 구하라였다. 그는 강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와 도움을 주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단톡방에 있었던 최종훈을 설득해 그 경찰 인사가 누군지 밝히도록 한다. 이 이야기를 전하며 강 기자가 말한다. “구하라씨는 정말 용기 있는 여성이에요.” 아, 용기. 나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진 채로 그 말 앞에 머물렀다.
용기는 구하라만의 것은 아니었다. 정준영이 성범죄로 피소된 사실을 가장 먼저 보도한 스포츠서울의 박효실 기자도 용기를 낸 사람이다. 버닝썬 사건의 출발점이 된 기사를 쓰고 난 뒤 박 기자는 정준영의 팬들과 ‘안티 페미니스트’들에게 무차별 공격을 당했다. 이 괴롭힘은 온·오프라인으로 수개월간 계속되었다. 두 번의 유산을 겪으면서도 버텼던 이유 중 하나는 “내 뒤에 많은 여기자들이 동일한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본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 역시 용기를 말하고 있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전설적인 사진작가 낸 골딘의 삶과 작품세계를 소개한다. 세계가 강요하는 정상성과의 불화를 이미지로 승화해낸 작품의 도발적인 아름다움도 인상적이었지만, 동시에 그가 지금 벌이고 있는 투쟁의 급진성이 발산하는 미(美)에는 숭고함마저 있었다.
골딘과 동료 활동가들은 마약성 진통제를 팔아 거부가 된 새클러 가문과 4년이 넘는 싸움을 벌였다. 5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약물 중독으로 사망했지만, 국가나 시장은 물론 사법체계조차 새클러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러나 골딘과 동료들은 새클러의 후원을 받아 그들이 피로 번 돈을 세탁해주었던 대학, 박물관 등과 끝까지 싸워 새클러라는 이름에 둘러진 ‘우아한 권력’의 망토를 끌어내린다.
이 투쟁의 용기는 그저 잘나가는 아티스트가 자신의 커리어를 걸었다는 것 혹은 활동가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에 저항하면서 각종 위험을 감수했다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약물 중독자에 대한 낙인 그 자체와 싸우기 위해 이름과 얼굴을 걸고 거리로 나섰다. 몸에 새겨진 중독의 기억을 안고서 말이다. 그야말로 두려운 일이었을 터다.
“저도 리벤지 포르노 피해자잖아요.” 구하라는 강 기자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다른 여성들이 이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이건 버닝썬 성폭력 피해자가 BBC 인터뷰에 응하며 한 말이다. 버닝썬은 K팝 스타들의 일탈이라는 표면을 뚫고 들어가 한국 사회 남성연대의 노골적인 얼굴을 폭로했다. 박효실의 용기에 강경윤의 용기, 구하라의 용기, 그리고 수많은 여성들의 용기가 더해진 자리에서 비로소 그 심층까지 들어가는 길이 열렸다. 그리고 그들이 겪은 일이 그들을 용감하게 만들었다. 골딘과 약물 중독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경험이란, 그런데, 나를 해치고 더 움츠러들게 만드는 경험이라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우리를 움직이게 만든다는 걸? 내 무릎을 꺾는 일들 안에서 나는 과연 용기를 낼 수 있을까? 답이 쉽지가 않아 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