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는 죽음 직전에 시를 썼다. 스스로를 아테네의 쇠파리라고 부를 정도로 논리적인 변증술로 사람들의 무지를 일깨워 주는 것을 사명으로 삼은 사람이 시를 쓴 것이다. 사형이 집행되는 날, 소크라테스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과 가족이 찾아오는데, 이때 있었던 마지막 대화에서 케베스는 이솝의 우화를 시로 쓴 적이 있는지 묻는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꾼 꿈들이 시를 지으라고 명한 듯해서 “신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시를 썼다고 대답해 준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철학은 가장 위대한 시가”로 덧붙이지만 죽음 직전에 시를 썼다는 <파이돈>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아테네 시민들을 말(로고스)로써 성가시게 하던 소크라테스의 또 다른 내면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는 재판에서 시인들이 “모종의 본성에 따라서” 시를 지을 뿐이지 지혜가 있어서는 아니라는 의견을 피력했는데 결국 그 자신도 시의 힘을 어쩌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사람을 이성이나 정신으로만 환원할 수 없음을 죽음 앞에서 인정한 것일까. 시가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모종의 본성”(본능)으로 쓰는 것인지는 오늘날에도 되물을 문제지만, 소크라테스에게 당대의 시인들은 민중의 감성과 현실적 삶에 대한 바람에만 머물러 있다는 인식을 주었거나, 아니면 아리스토파네스가 자신을 작품에 등장시켜 희화화시키는 등 비합리적인 것에 몰두한다는 반감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이유야 어쨌건 고대 아테네 사회에서 시가 민중의 것이었음은 명백한 사실인데, 우리는 그것을 대(大)디오니소스 축제 때 벌어진 비극 경연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데 니체의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시를 시민의 덕목에서 삭제하려고 했고 소크라테스가 그리스 비극을 몰락시킨 장본인이라고 비난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소크라테스적 전환이 서구 근대의 정신적 뿌리였다고 본다.
고대 아테네에서 시는 민중의 것
고대 아테네에서 비극(의 본질을 차지하는 시)의 융성은 민주주의와 관계가 깊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그에 발맞추어 비극 양식도 꽃피기 시작했지만 펠레폰네소스 전쟁과 그 패배로 인한 사회적 후유증 속에서 생명력을 잃어갔다. 민주주의를 싫어하는 귀족주의자로 알려진 니체가 아테네 민중이 ‘함께’ 참여한 대(大)디오니소스 축제에서 경연을 벌인 비극을 찬양하는 반면에 민중 장르인 비극을 현실의 지적/사회적 엘리트들이 참여할 수 있는 정신 철학으로 대체한 소크라테스를 비난한 것은 아이러니다. 그렇다고 해서 철학 자체를 엘리트들의 전유물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민중 장르인 신화적 비극이 엘리트 장르인 철학으로 대체되던 시기에 아테네 민중 법정이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선고한 사실은 우리의 사유를 자극한다.
우리 문학사에서 민중시의 지평을 본격적으로 연 것은 신경림 시인의 시집 <농무>였다. <농무>를 빼놓고는 그 이후에 형성된 민중시 전통을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농무>는 무엇보다도 ‘민중 언어’로 지어졌다는 점에서 시가 지적 엘리트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걸 입증했다. 쉽게 말해 민중 스스로 자신의 삶과 꿈과 욕망을 시로 지을 수 있는 징검돌을 놓은 것이다. <농무>의 등장과 함께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본격화된 점도 깊이 생각해 볼 문제다. 민중이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언어로 민중 자신의 삶과 내면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만큼 민주주의의 살아 있음을 가리키는 것도 없을 것이다. 10여년이 지나서 노동자들이 직접 시를 짓기 시작한 것도 <농무>의 등장이 가져온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민중시가 나타난 사실을 문학사의 테두리에서만 좁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 역사의 지하에 면면이 흐르던 ‘거대한 뿌리’(김수영)가 피워 낸 꽃잎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한국 문학 새 지평 열어준 신경림
소크라테스의 예에서 보았듯 ‘시의 마음’이라는 것은 삶에 있어서 근원적인 것이다. 그리고 신경림 시인은 그 ‘시의 마음’이 엘리트들의 부족함 없는 교육이나 윤택한 생활이 아니라 민중의 구체적 삶에서 생기하는 것임을 보여줬으며, 동시에 시인 스스로 민주주의를 향한 물길에 삶을 실었다. ‘시의 마음’이 사람에게 근원적인 것이듯 민주주의도 공동체적 삶에서 근원적인 것이다. 그리스 비극이 아테네 민주주의와 역사적 궤를 같이했다는 사실은 민주주의적인 삶과 시가 생각보다 강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해 주는 것 아닐까?
2024년 5월22일, 신경림 시인이 돌아가셨다. 그간 민주주의의 퇴행과 시의 지리멸렬이 ‘한 쌍’이 아닌가 의심 중이었는데, 신경림 시인의 죽음은 시의 자리가 어디여야 하는지 묻고 있는 것 같다. 지금의 시가 민중을 떠나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시인의 죽음이 다른 물음의 시작인 경우도 그리 흔치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