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국민연금으로 인한 세대 간의 불평등은 기후위기로 인한 세대 간의 불평등보다는 훨씬 단순한 구조다
진보가 미래세대 착취를 예방하는 최소한의 의무로, 이 불평등을 바로잡긴 어렵지 않다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이 결정되고 나면 곧바로 ‘선제적 재정투입’과 ‘수익률 제고방안’을 결정해야 한다
흔히들 보수 혹은 우파가 ‘자유’를 좀 더 중시한다면, 진보 또는 좌파는 ‘평등’을 좀 더 중시한다고 한다. 그런데 국민연금을 두고 일어나는 지금의 논의를 보고 있자면 한국의 진보 또는 좌파의 평등 개념에 중대한 결함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계층 간 평등’에 치중하고 ‘세대 간 평등’을 경시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진보적 세대 담론은 2007년 나온 <88만원 세대>에서 시작하여 2022년 나온 <그런 세대는 없다>로 한 주기를 마쳤다. <88만원 세대>에서 촉발된 세대론은 뜻밖에 보수 언론에 적극 전용되었다. ‘86’으로 대표되는 기성세대가 고도 경제성장기에 꿀을 빨아놓고는 계층이동 사다리를 걷어차고 청년을 착취한다는 담론으로 비화된 것이다. <그런 세대는 없다>의 저자 신진욱 교수는 한 세대가 다른 세대를 착취한다는 식의 ‘그런’ 세대론이 유효하지 않음을 효과적으로 보여줬다.
그런데 세대론을 ‘미래세대’로 확장해도 이런 접근이 유효할까. 배의 밑바닥에 구멍이 생겨 배가 천천히 가라앉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배의 ‘위 칸 승객’과 ‘아래 칸 승객’ 사이의 불평등을 지적하고 개선하려는 노력도 의미가 있지만, 일단 배의 구멍을 틀어막는 일이 더 중요할 것이다. 배가 일정 수준 침수되고 나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국민연금이라는 배의 구멍을 틀어막을 방법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데 진보 언론과 정치권은 구멍을 막는 데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국민연금 본연의 기능인 노인 빈곤 방지나 사회연대의 강화를 강조할 뿐, 미래세대의 부담은 별것 아니라고 치부하는 것이다.
지난 3월 국회 소속 연금개혁특별위원회는 국민연금 개편 1안과 2안을 공론화에 부쳤다. 1안은 ‘더 내고 더 받기’, 2안은 ‘더 내고 그대로 받기’다(보험료율은 1안 13%, 2안 12%로 인상, 소득대체율은 1안 50%, 2안 현행 40% 유지). 500명의 시민대표단이 1개월간 토론한 결과 56%가 1안을, 42.6%가 2안을 지지했다. 더불어민주당은 1안, 국민의힘은 2안을 주장했고 소득대체율 44%로 타협이 될 듯 말 듯한 상황이다.
그런데 미래세대의 입장에서 봤을 때 1안과 2안은 오십보백보다. 1안은 2061년, 2안은 2062년에 적립금이 고갈되니 그 시기에는 사실상 차이가 없다. 그 뒤에는? 진보적 복지 전문가들은 ‘연금 적립금이 고갈된다고 해서 국민연금을 못 받는 일은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많은 선진국이 ‘그때 걷어서 그때 지급하는’ 방식(이른바 부과식)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 재정으로, 다시 말해 국민 세금으로 국민연금을 지급하는 것이다. 한국도 그렇게 바꾸면 된다는 얘기다.
미래세대엔 2개 안이 오십보백보
문제는 한국의 극심한 저출생·고령화로 인해 미래세대의 부담이 과중해진다는 점이다. 10대 이하 미성년자의 경우, 적립금이 고갈되는 2061년에 36%(1안) 내지 31%(2안)를 국민연금을 위해 내야 한다. 지금 거론되는 보험료율 12~13%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18%를 아득히 뛰어넘는다. 올해 출생아가 50대가 되는 2078년에는 43% 내지 35%로 치솟는다.
태어날 아기들에게 미안해해야 할 판이다.
진보는 여기서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최근 ‘국민연금 못 받을 거라는 공포 마케팅’(한겨레S 4월28일자)이라는 글을 통해 국민연금에 대한 각종 흑색선전을 맹렬히 공격했다. 그러면서 얼핏 “국민연금 적립금이 소진된다는 건 국가가 그때까지 단 한푼의 재정 지원을 하지 않고, 연금기금 수익률이 4.5%이며, 그때까지 연금개혁이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가정에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아쉽게도 그는 여기서 한 발짝도 구체적으로 나아가지 않고, 국민연금을 민간 보험상품처럼 여기는 통념을 공격하는 데에만 치중한다. 최근 3명의 사회복지 전문가들이 펴낸 책 <국민연금 가치선언>도 아쉽긴 마찬가지다. 국민연금을 통해 보장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당위론을 겹겹이 둘러치는 가운데, 인구구조의 변화로 인해 미래세대의 부담이 갈수록 커진다는 얘기는 쏙 빠져 있다.
세대 간 불평등에 대한 해답은 올해 2월 나온 <국민을 위한 국민연금은 없다>라는 책에 있다. 김우창(카이스트 교수), 원종현(국민연금 투자정책자문위원장), 유원중(KBS 기자) 등 3명의 공저자는 발상을 전환한다. 기존의 시나리오들에 의하면 기금은 언젠가 고갈되고, 고갈 시점부터는 정부 재정을 투입해야 한다. 그렇다면 나중에 어차피 정부 재정을 투입할 텐데, 지금부터 선제적으로 투입하면 어떨까. 나중에는 가래로도 막기 어렵지만 지금은 호미로 충분히 막을 수 있게 된다. 국내총생산(GDP)의 1%에 해당하는 재정을 선제적으로 투입하면, 현재도 계속 늘어나고 있는 적립금을 GDP의 100%가 넘는 수준에서 영구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나오는 막대한 수익을 통해 미래세대의 과중한 부담을 막고 보험료율을 고정시킬 수 있는 것이다.
‘3115 연금개혁안’이 해답 제시
이들의 제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 연금 보험료율을 현재 9%에서 12%로 높인다. 민주당이 주장하는 1안보다 오히려 1%포인트 낮다. 둘째, GDP의 1%에 해당하는 정부 재정을 선제적으로 투입한다. 이는 현재 약 20조원으로 정부 예산의 3%에 해당하는데, 갑자기 투입하는 게 아니라 점진적으로 늘려 2030년에 GDP 1%에 도달한다. 셋째, 기금 수익률을 현재보다 1.5%포인트 높여 6%를 달성한다. 캐나다 연금기금의 수익률이 10%임을 고려하면 가능한 수준의 목표다. 저자들은 연금 보험료율 3%포인트 인상, GDP 1%의 정부 재정 투입, 기금 수익률 1.5%포인트 상승의 숫자들을 조합하여 ‘3115 개혁안’이라고 이름 붙였다. 소득대체율 40%(현행 유지)를 전제로 계산되었으나 50%일 때의 시나리오도 내놓고 있고, 아울러 연금 사각지대를 해소할 방안도 제시하고 있다.
놀랍게도 연금개혁 공론화 보고서에 ‘3115 연금개혁안’의 핵심이 나와 있다. ‘공적연금 세대 간 형평성 제고방안’을 주제로 시민대표단이 토론 및 3차례 내부 설문을 한 것이다. ‘사전적 국고 투입을 통해 미래세대의 과도한 부담을 완화한다’는 안에 최고 87.1%가, ‘수익률 제고를 위해 전문성과 독립성을 강화한다’는 안에 최고 91.6%가 각각 동의했다. ‘3115 개혁안’의 핵심인 ‘선제적 재정 투입’과 ‘수익률 제고’가 모두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것이다. 보수 언론은 시민대표단의 20대 청년들마저 1안으로 기울어진 것에 대해 이들이 가스라이팅이라도 당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는데, 시민대표단이 단순히 보험료율이나 소득대체율을 넘어 이 같은 내용까지 논의했음을 고려하면 놀랄 일이 아니다. 다만 선제적 재정 투입안이 4월22일 이뤄진 위원장의 브리핑에서 빠졌고 언론에도 전혀 보도되지 않았으며 결국 정치권으로도 전달되지 않고 있음은 심각한 문제다.
사실 국민연금의 지속 가능성과 세대 간 형평성을 고려한 개혁안으로 한 가지가 더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이강구·신승룡 연구위원이 올해 2월 내놓은 안인데, 새로운 세대에 적용할 ‘완전적립식 신연금’을 점진적으로 도입하여 구연금을 대체하는 것이다. 최근 개혁신당에서 이 방안을 지지하고 나섰다. 다만 이 안은 소득대체율을 고정시키고 진행하는 현재의 논의 구도와 호환이 불가능하다는 단점이 있다. 반면 <국민을 위한 국민연금은 없다>가 제시하는 ‘3115 개혁안’은 1안이든 2안이든 절충안이든 결정되고 나면 즉시 후속 내용을 덧붙임으로써 추진할 수 있다.
세대 간 불평등 문제는 환경과 관련해선 이미 친숙한 이슈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2021년 미래세대에게 탄소예산을 소비할 권리를 불평등하게 분배했다는 이유로 독일의 탄소 감축 목표가 위헌이라고 판정했다. 이에 따라 독일 정부는 목표를 보다 엄격히 변경해야 했다. 2023년 미국 몬태나주 법원은 주정부가 승인한 석탄·천연가스 프로젝트가 미래세대의 권리를 침해했다는 이유로 불법이라고 판결했다. 한국의 국민연금으로 인한 세대 간 불평등은 기후위기로 인한 세대 간 불평등보다는 훨씬 단순한 구조다. 진보가 이 불평등을 바로잡긴 어렵지 않다.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이 결정되고 나면 곧바로 ‘선제적 재정 투입’과 ‘수익률 제고 방안’을 결정해야 한다. 이것은 미래세대 착취를 예방하는 최소한의 의무다.
서울대 학부에서 생물학, 대학원에서 과학사·과학철학을 전공했다. 박사과정 수료 후 수능 과학탐구 강사가 돼 ‘메가스터디’ 창업에 참여했다. 2003년 ‘일타강사’ 시절에 은퇴한 드문 기록을 갖고 있다. 이후 교육평론가, 정책전문가로 변신했다. 서울시교육청 정책보좌관, 민주연구원 부원장, 한겨레신문·시사인·허핑턴포스트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현재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지난 40년간의 한국 교육정책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주제로 연구를 시작했다. 저서로 <문재인 이후의 교육>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