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쟁이와 또라이 사이

이주영 경제부문장

여왕 엘리자베스 2세를 중심으로 20세기 영국 사회를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 시즌4에는 마거릿 대처 총리가 등장해 여왕과의 팽팽한 긴장 관계를 보여주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중산층 집안 출신으로 열정과 노력을 토대로 자수성가한 대처 총리는 일을 하지 않고 여가와 유흥으로 시간을 소비하는 왕실 사람들을 경멸한다. 반면 25세에 군주의 자리에 오른 엘리자베스 여왕은 정치적 실권은 없지만 자신의 영향력을 통해 과거 대영제국 시절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두 사람이 일하는 방식은 매우 대조된다. 엘리자베스 2세가 침묵과 절제, 인내를 통해 입헌군주제의 틀을 유지하려 한 반면 대처 총리는 ‘철의 여인’이라는 별칭답게 갈등과 투쟁을 마다하지 않는 태도로 국정을 운영한다. 타협할 줄 모르는 강경한 행보로 일관하면 적을 많이 만들게 될 거라는 여왕에게 대처 총리는 이렇게 응수한다. “무언가를 해내려면 적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 적이 없다면 투쟁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이룬 것이 없는 겁쟁이에 불과하다”고. 조직 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각자의 경험을 떠올리며 끄덕끄덕하게 되는 말이다. 두 사람의 대비되는 행보에는 당시 영국 내에서 공화제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세습 군주의 입지가 점점 줄어들던 시대적 흐름도 한몫했을 것이다.

어떤 조직이든 일을 하다보면 다양한 갈등 상황에 마주하게 된다. 부당한 지시, 암묵적 강요, 복지부동, 매너리즘, 감정노동을 요구하는 인간관계 등. 서로 다른 의견이 팽팽히 맞서는 경우도 흔히 생긴다. 이럴 때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해 조직이 보다 나은 선택을 하도록 힘을 보태는 것이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다운 태도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이런 경우 발언하는 사람은 사실 별로 없다. 괜히 나섰다가 유별난 사람으로 찍히거나 추후 어떤 책임을 지게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입 닫고 있는 게 낫다는 선택을 하게 된다.

토론과 협의는 생각을 맞춰나가는 과정인 만큼 다른 사람과 얼굴을 붉히거나 반박·재반박을 주고받는 일이 생길 수 있다. 피곤한 과정이다보니 직접 당사자가 아니면 침묵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구성원들이 침묵하는 조직은 건강하지 못하다. 올바른 선택을 할 확률도 떨어진다. 그 피해는 침묵하는 다수를 포함한 조직 전체에 돌아간다.

이는 작은 단위의 조직에서뿐만 아니라 국가 단위에서도 마찬가지다. 정책과 방향을 설정하고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는 조직일수록 치열한 논리 싸움을 통한 의견 조율이 필요하다. 입장 차이가 있다면 사전 협의를 통해, 정책 조정에 실패했다면 컨트롤타워가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맞다. 금융당국 수장의 공매도 일부 재개 입장 표명에 대통령실이 공개 반박하고, 국무조정실이 발표한 해외 직구 대책이 논란이 되자 대통령실이 몰랐다고 선을 긋는 식이라면 국민들 입장에선 뭘 하겠다는 건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공직 기강을 다잡겠다며 복무 점검, 특별 점검에 매달리는 것은 오히려 정권 스스로 자신감이 없다는 걸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의도에선 22대 국회의 임기가 시작됐다. 21대 국회는 여야가 정쟁에만 몰두하다 역대 가장 낮은 법안 처리율을 기록하며 ‘식물 국회’라는 오명을 남겼다. 개개인이 헌법기관인 국회의원들이 자신들에게 부여된 책임과 의무가 뭔지도 모른 채 당원, 계파, 권력에 끌려다녔다. 침묵해야 할 때 입을 다물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 침묵하는 비겁함을 수없이 드러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의 면면을 보면 어떻게 저런 사람이 국회의원이 됐을까 싶은 사람이 적지 않지만, 새로운 4년을 시작하는 국회에서는 소신과 양심에 따른 입법 활동을 펼쳐주길 희망해본다. 불합리한 구조와 관행을 바꾸기 위해 필요하다면 또라이 역할을 마다 않는 정치인의 등장을 기대해본다.

원영적 사고와 희진적 사고가 회자되고 있다. 그룹 아이브의 멤버 장원영처럼 어떠한 부정적인 상황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원영적 사고라 부른다. 희진적 사고는 기자회견장에서 하이브를 향한 불만을 거침없이 드러낸 민희진 어도어 대표처럼 분노를 참지 않고 직설적으로 표출하는 것을 빗댄 말이라고 한다. 원영적 사고가 건강에는 더 좋다지만, 뉴스만 봐도 분노할 거리가 넘쳐나고 부조리극 같은 우리의 현실에서 희진적 사고를 하지 않고는 버티기가 쉽지 않다. 어떤 경우든 정신 승리는 필요한 것 같다.

이주영 경제부문장

이주영 경제부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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