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설야 시인
[詩想과 세상]잠만 잘 분
100-15, 잠만 잘 분,
잠만 잔다는 건 시체놀이를 하라는 것
층간소음도 없고
음식 냄새가 창을 타고 넘어갈 리도 없으니
쾌적하다는 것
어차피 둘이 누울 자리는 없으니
친구나 친지도 필요 없고
먹다 남은 양파나 감자가 있으면 화초 대신 심으라는 것
거기에 싹이 나고 잎이 나서, 수맥이 지나가나?
굳기름처럼 굳은 몸을 뒤척일 때
양파나 감자가 식물성의 손을 내밀 거라는 것
그러다 꿈에 다시 군대에 가서
저의 어머니가 확실합니다, 소리치거나
외박증을 끊어 면회 온 애인과 여인숙에 들면, 들다가 깨면
장막 저편의 어머니는 내 어머니가 아니고
팔베개해 준 그녀는 내 그녀가 아니고
그래도 국민연금과 지역 의보 통지서는
언덕을 올라와, 옥탑까지 올라와,
속옷과 양말 사이에서 기어이 그이를 찾아내고
밤에 내려다보면 붉게 빛나는 수많은 십자가들 아래
제각각 누워 있는 잠만 잘 분,
성탄도 부활도 없이
잠만 잔다는 건 꼼짝도 하지 말라는 것
자면서도 그이는 손을 들고 잔다

권혁웅(1967~)


‘잠만 잘 분 구함’이라고 쓴 종이를 문에 붙인, 허름한 집을 지날 때가 있다. 다닥다닥 모여 있는 젖은 방들의 문을 열고 들어간 사람들이 슬픔을 왈칵 쏟아놓고 “시체놀이”하듯 잠만 자는 방. 무덤처럼 “수많은 십자가들 아래”, “제각각 누워” 겨우 숨만 쉬면서 자는 방.

그 방들이 있는 곳에도 어김없이 “국민연금과 지역 의보 통지서”는 문을 열고 들어온다. “속옷과 양말 사이에” 누운 사람들을 기어이 찾아낸다. 세상 끝 모서리에 있는, 잠만 자는 방에서 세금고지서 같은 밤들이 구겨진 쪽잠을 잔다. 움직일수록 작아져 “꼼짝도” 할 수 없는 내일이 “손을 들고” 간신히 잠을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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