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문근융해증. 육군 12사단 훈련병의 사인으로, 타격 및 압력이나 무리한 운동 등으로 근육이 괴사해 장기를 손상시키는 증상을 뜻한다. 낯선 의학 용어지만 언젠가 본 적이 있는 단어다. 2014년 5월 윤 일병 사망의 수사단장이던 6군단 헌병대장은 음식물에 의한 기도폐쇄를 사인으로 발표했다. 이후 유가족이 공개한 의과대학 법의학 전문가의 감정서는 횡문근융해증을 윤 일병의 사인으로 지목했다.
정확히 10년의 시차를 두고 등장한 횡문근융해증. 누군가에게 그 시간은 짧았다. 분노와 슬픔을 몸에 간직한 채 인권운동가로 살아온 유가족이 보기에 이번 사건은 되풀이되는 구조적 문제다. 하지만 12사단 훈련병을 죽음으로 몰고 간 중대장의 성별을 사건의 원인처럼 여기는 이들이 있다. 사망의 원인을 고인의 체력 탓으로 돌리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10년 전을 기억하지 못한다. 윤 일병 이후에도 군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이 죽는 일이 반복되었지만, 그들은 이 ‘구조적 죽음’을 잊은 채 누군가를 손쉽게 비난하는 데 열을 올린다. 마치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중대장이 육군 규정을 어긴 것만을 문제 삼는다면, 그를 ‘예외사례’로 치부하게 된다. 관련 규정을 강화하고 그것을 준수하도록 만들면 된다. 이 익숙한 군대식 일 처리는 구조를 건드리지 않는다. 애초에 군대가 사회적 룰이 통하지 않는 ‘예외지대’로 남아 있는 한, 규정을 어기는 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걸핏하면 등장하는 안보불감증이란 말은 절반의 진실을 담고 있다. 남북 군사갈등이 고조돼도 한국사회는 별 걱정을 하지 않는다.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시민들은 지속되는 전쟁이 주는 스트레스를 군부대에 떠넘겼기 때문이다. 그 스트레스는 온전히 병사들의 몫으로 남는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군대는 사회의 룰이 작동하지 않는 예외적 영토이자 섬으로 남아야 한다. 그 섬에서는 억울한 죽음이 언제든 발생할 수 있고, 국가는 시민을 지켜주지 않는다. 애꿎은 동료시민 여성들을 비난한들, 희생을 전가하는 이 냉전/분단의 시스템은 굳건하기만 하다.
훈련병을 죽게 한 중대장은 언제든 나올 수 있다. 애초 그를 장교로 뽑은 건 군대이고 국가이기 때문이다. 시스템을 추궁하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임성근은 왜 사단장이 될 수 있었나? 아마도 그는 행정의 보여주기식 일 처리를 능숙히 해내며 사단장 자리까지 갔을 것이다. 그 이면엔 출세를 위해 아랫사람들을 닦달하고 쥐어짜는 걸 ‘능력’이라 보는 시스템이 있다. 그런 자들이 선발되고 성공한다면, 그것은 예외사례가 아닌 시스템의 문제다.
사회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모두 공감하듯, ‘나쁜 놈이 잘나간다’는 건 이 사회의 암묵적 진실이다. 그런 자들이 승승장구해 더 많은 권력과 책임을 쥐게 됐을 때, 12사단 훈련병과 채 상병 같은 억울한 죽음이 생겨난다. 그럴수록 그들은 무책임으로 일관하며 아랫사람을 방패막이 삼아 살아남으려 할 것이다. 식민지와 냉전의 역사가 만들어 낸 이 출세지향적 인간형은 지금도 잘나가고 있다. ‘나쁜 놈이 잘나간다’가 한국사회의 룰이자 상식이라는 것은 사실 이 사회도 ‘예외상태’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지속되는 전쟁의 스트레스를 군대라는 예외지대에 전가하고, ‘나쁜 놈’이 승리하는 군조직과 사회가 유지되는 것에는 시민들도 책임이 있다. 엄한 사람을 탓하는 대신 구조와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데 관심을 모아야 한다. 가해자를 처벌하고 정부에 책임을 묻는 건 문제해결의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군대를 사회적 상식이 통용되는, 사회의 일부로 만들어야 한다. 다행히 10년의 시차를 두고 수사단장이 변했다. 윤 일병 유가족은 이를 ‘기적’이라 말한다. 이제 박정훈 대령 같은 사례가 놀라운 예외가 아닌 당연한 일로, 상식으로 여겨지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