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좀 서로 의식하지 말고 살자’

이대근 칼럼니스트

2020년 6월15일 중국·인도 접경지 카슈미르 라다크에서 양국 군인이 충돌해 사상자가 발생했다. 군인들은 주먹, 돌, 몽둥이로 싸웠다. 2022년 12월9일 인도 동북부 아루나찰프라데시주(州) 타왕 지역에서도 양국 군인이 충돌했다. 주먹으로 싸워 수십명이 부상했다. 핵무장한 두 강대국이 석기시대 전투를 한 것이다. 남북 간에도 그런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실질적 핵보유국 북한, 세계 유수의 군사대국 남한이 풍선에 전단, 1달러 지폐, 아니면 똥, 쓰레기를 담아 치열한 풍선 공방전을 하고 있다.

주먹싸움엔 풍선 공방전과 다른 면이 있다. 중국·인도 간에는 소규모 분쟁이 대규모 분쟁으로 확산되는 걸 막기 위한 장치가 있다. 분쟁에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합의다. 남북 간에는 그런 것이 없다. 풍선 갈등, 바람 따라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다.

한반도 정치군사적 대립 구조는 그 원인, 해결책이 무엇인지 잘 알려져 있다. 군사적 긴장 완화, 군축, 평화협정, 북·미관계 정상화 같은 것들이다. 당사국 간 순서와 조건이 맞지 않아 타협을 못해서 그렇지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안다. 정치군사 문제는 어느 정도 이성의 영역에서 작동한다.

원시적 풍선 갈등은 원시적 감정과 연결되어 있다. 풍선에 가득 담긴 것은 상대 혐오, 조롱이다. 미국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 연구에 따르면, 이성이 감정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다. 감정이 판단하고 결정하면, 이성은 그걸 설명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감정이 주인, 이성이 하인이다.

우리의 이성은 남북이 화해를 위해 서로 상대의 마음을 살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래 남북은 서로 나쁜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왔다. 북한의 대남 감정만 악화된 게 아니다. 남한의 대북 감정도 더 이상 나쁠 수 없을 만큼 나쁘다.

감정의 악순환에 빠진 한반도에서 어떻게 하면 감정이 이성을 마비시키는 일을 막을 수 있을까? 김여정이 제시한 해법이 있다. 그는 2022년 8월 담화에서 “제발 좀 서로 의식하지 말며 살았으면 하는 게 간절한 소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제발” 했던 김여정은 그 이후에도 남한을 지나치게 의식한다. 할아버지 수염을 잡아당기는 버릇없는 아이처럼 시도 때도 없는 욕설 담화로 남북을 감정적으로 얽어맨다. 김정은의 두 국가론도 마찬가지다. 김정은이 올해 초 남북관계를 전쟁 중인 두 교전국 관계라 선언하고, 통일·민족·화해와 같이 남북을 하나로 묶는 개념을 폐기했지만, 두 국가 분리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전쟁 중인 두 국가가 엉키지 않고 서로 소 닭 보듯 자기 일만 하며 살 방법이 없다.

남쪽도 다르지 않다. 대북전단 살포를 그만둘 것 같지 않다. 통일론도 다시 띄운다. 북한이 통일 포기를 선언하자 보수진영은 통일 주도권, 통일 우월성을 남한이 갖게 되었다며 통일론에 불을 붙인다. 윤석열 대통령은 ‘통일 대한민국’을 강조한다.

말처럼 쉽지 않지만 당분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의 감정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서로 상관하지 않기, 자극할 생각 않기, 얽히지 않기를 해야 한다. 즉, 전략적 무관심이 필요하다. 화해, 동포, 민족, 통일처럼 특수한 관계에서 나오는 피 끓는 열정이 아닌, 보편적 관계에 적용되는 차가운 개념과 가치가 필요하다. 평화다. 평화도 뜨거울 수 있다. 적극적 평화 만들기가 그렇다. 지금 한반도 정세에서 그건 불가능하고 또한 위험한 일이다. 특히 자주 격노하고, 그 때문에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는 지도자가 남북 양쪽에 있는 한 더욱 그렇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소극적 평화, 최소한의 평화다. 그것은 남북 간에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없는 상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부작위의 시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그걸 위해서는 상당한 인내와 자제, 평정심이 요구된다. 윤석열은, 평화는 굴종이 아니라 힘으로 지키는 것이라는 이분법을 주장했다. 남북은 이미 상대를 절멸시킬 충분한 힘을 갖고 있다. 평화 부재는 힘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자제할 줄 아는 지혜의 결핍 때문이다.

남북 간 풍선 대 풍선, 정부 대 정부의 대칭적 대립 구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단 대 오물, 정부 대 민간, 표현의 자유 대 최고존엄 수호 같은 비대칭적 대립 구도도 있다. 이런 것들이 뒤얽히면서 만들어내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무슨 일을 낼지 알 수 없다. 양측은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감정적으로 다 준비되어 있다. 한반도는 작은 불꽃이 튀어도 폭발할 수 있는, 가스가 가득 찬 좁은 방과 같다.

이대근 칼럼니스트

이대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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