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격노했을까?’ 해병대 채 상병 순직 사건과 관련하여 윤석열 대통령의 ‘격노’가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이 사고에 대한 해병대수사단의 수사 과정에서 대통령실과 국방부가 외압을 행사했다는 의혹과 관련하여 대통령의 격노가 불거진 것이다. 대통령이 실제로 격노했는지, 어떤 식으로 반응했기에 격노라고 하는 것인지, 현장에 없었던 우리는 사실 알 길이 없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은 오히려 편견의 살을 붙여 의혹을 부풀릴 뿐이다. 대통령의 행위가 격노였는지 질책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격노로 해석되어 널리 퍼진 것은 분명하다. 여기서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수사 중인 이 사건 자체보다는 우리 사회에서 화와 분노가 가지는 의미다.
왜 우리는 격노할까? 사람들은 종종 어떤 일에 대해 화를 내고 분노한다. 분노는 사실 상호작용으로 얽혀 있는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현상이다. 누구나 화를 내고 분노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대통령이 격노하면 안 되냐, 격노한 게 죄냐”는 말은 그리 틀린 말이 아니다. 대통령도 사람이니까 격노할 수 있지만, 대통령으로서 화를 내는 게 적절한지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그렇다면 십분 양보하여 이렇게 물어야 한다. 왜 우리는 화를 잘 내는 것일까? ‘화병’(火病)이라는 한국적 병리 현상이 국제적 학술 용어로 등재된 것을 보면, 우리는 화를 잘 내는 민족인가?
대통령의 ‘격노’에 관한 보도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먼저 ‘분노’를 생각했다. 어떤 일에 분개하여 몹시 성을 내는 걸 분노라고 한다. 무언가 불쾌한 일이 생겼을 때 이를 회복하고자 하는 행위가 분노이다. 그렇다면 격노는 무엇을 말하는가? 격노의 사전적 의미는 몹시 분하고 노여운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것을 말한다. 분노를 이해하려면 분한 감정이 드는 상황을 떠올리면 쉽다. 동생이 혼자 놀다가 부딪혀서 울고 있는데 엄마가 전후사정을 알아보지도 않고 동생을 때렸다고 야단치면 분한 감정이 든다. 어떤 일을 규정과 절차에 따라 처리하고 있는데, 상사가 왜 제대로 하지 않냐고 질책하면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분하다는 것은 억울한 일을 당하여 화나고 원통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노의 전제조건은 ‘부당한 피해’
분노를 특징짓는 내용을 알려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분노는 “자신이나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 정당한 이유 없이 경멸당할 때 이에 대해 상상으로 보복하는 고통을 수반하는 욕망”이다. 이에 따르면 분노에는 몇 가지 요소가 있다. 우선 분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의 관점에서 무시와 경멸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 그 행위는 자신이나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게 행해진 것이어야 하며, 당한 사람은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분한 사람에게 고통과 불쾌한 감정을 일으키며, 그것에 대해 보복하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분노의 대상은 언제나 나에게 부당하게 피해를 준 사람이다.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이 왜 어떤 경우에 나에게 고통을 주는 것일까? 우리는 종종 잘 열리지 않는 문을 발로 차며 화를 내기도 하고, 나를 걸려 넘어지게 한 돌부리에 화를 내기도 한다. 그것은 문이 제대로 열릴 것이라는 기대가 어긋나고, 걸림돌이 나의 산책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무런 의지가 없는 문과 돌에 분노하지는 않는다. 분노는 대개 누군가가 내가 깊이 관심을 가지거나 높이 평가하는 것을 부당하게 훼손했을 때 일어난다. 엄마의 사랑과 신뢰를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고 기대하였는데, 정당한 이유 없이 꾸중을 듣는다면 누구나 분한 감정을 느낀다. 법규범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법치주의의 정신을 내면화한 사람이 정당하게 일을 했는데도 오히려 야단을 맞거나 법을 어기라고 강요당한다면, 분노하는 게 당연하다. 이처럼 분노의 가장 일반적인 전제조건은 ‘부당한 피해’이다.
분노를 일으키는 부당한 행위는 개인의 인격을 비하할 뿐만 아니라 그가 차지하는 사회적 지위를 훼손한다. 나를 모욕하거나 경멸하는 것, 나를 하찮은 존재로 취급하는 것은 모두 내가 사회적으로 수행하는 역할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자신의 지위에 대해 걱정하며,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에 대해 끊임없이 분노를 표출한다.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려고 하는데 직원이 전화를 받으며 바로 응대하지 않으면, 우리는 고객의 권리를 침해받았다고 생각하여 분노한다. 그러나 그 전화가 교통사고를 당한 어머니의 비상 전화였다는 사실을 알면 화를 낸 것을 미안해한다. 나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려고 하였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지위 손상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상상만으로도 분노하고 화를 낸다.
분노는 부당하게 손상된 상태와 지위를 회복하려는 행위이다. 분노는 언제나 보복을 원한다. 잘못에 대해 보복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경향이다. 그러나 분노는 언제나 사회 안에서 이루어진다. 민주사회에서의 분노와 권위주의 사회에서의 분노는 표현되는 양태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민주사회에서는 개인 상호 간의 분노는 부정적으로 보고, 사회와 제도에 대한 분노는 긍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는 사회를 보고 우리는 분노를 느끼면서 ‘이에 대해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폭우로 수해를 입은 현장에 투입되어 실종자 수색을 담당한 해병대원이 구명조끼조차 착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분노하는 것도 안전 불감증에 걸린 제도에 대한 사회적 분노이다.
대통령은 격노하면 안 된다
이에 반해 권위주의 사회에서는 부하 직원을 향한 상사의 분노가 부당하게 훼손된 상태의 회복보다는 권력 자체를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상사는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위협을 느끼면 분노를 표출하여 자신의 지배권을 다시 주장하고 하급자가 복종하도록 위협할 수 있다. 이러한 형태의 분노는 계층 구조를 강화하고 반대 의견을 억제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첫째, 두려움과 복종의 문화를 영속화한다. 보복의 가능성을 알고 있는 부하 직원은 반대 의견을 표명하거나 부당한 관행에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이 작다. 개인이 건설적 비판보다 자기 보존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혁신과 비판적 사고를 저해한다. 둘째, 통제 메커니즘으로 분노를 자주 사용하면 계층 내에서 폭력과 보복의 순환이 발생할 수 있다. 원한을 품은 부하 직원은 상사를 훼손하기 위해 은밀한 수단을 모색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불안정하고 불신하는 환경이 조성될 수 있다. 끝으로, 권위주의적 맥락에서 분노는 힘이 바로 정의라는 비민주적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다. 이는 법치주의를 훼손하고 기관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약화시킨다. 분노가 합리적 담론과 공정한 절차를 대체하게 되면 정치 체제의 정당성이 훼손되어 잠재적 불안과 격변을 초래할 수 있다.
권위주의 사회에서 분노하고 격노하는 주체는 언제나 힘을 가진 권력자다. 왜 권력자는 격노할까? 권력자는 대부분 자신의 지위가 훼손되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할 때 격노하고, 단지 권력을 보여주기 위해 분노를 사용하기도 한다. 분노의 전제조건인 ‘부당한 훼손과 침해’가 없는데도 권력자는 화를 낸다. 이 경우 분노가 격분의 형식으로 나타나긴 하지만, 화를 낸다는 것이 실제로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잘못에 대하여 엄하게 나무라는 ‘꾸짖다’ 또는 ‘야단치다’를 의미한다. 대통령실의 뒤늦은 해명에 따르면 대통령은 사실 군 당국과 당시 수사단장을 야단쳤다고 한다. 물론 대통령은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건을 처리하는 담당자를 질책할 수 있다. 거기에 정당한 사유가 있는지 또 소리를 높여 호되게 꾸짖는 방식이 과연 옳은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우리가 진정한 민주사회를 원한다면, 상급자가 하급자를 야단치는 전통적 방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우리 문화의 고유한 질병이라고도 할 수 있는 화병은 정당한 이유 없이 야단맞은 사람들이 분노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발생하는 정신적 신체적 질환이지 않은가? 화를 내도 시원치 않은 국민이 오히려 화를 당한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권력자가 화를 자주 내면 국민이 화병에 걸리거나 아니면 정권을 뒤집는 분노의 물결을 불러올 수도 있다. 그래서 대통령은 격노하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