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가 반복되면 그건 사고가 아닌 사건이다. 사고는 언제든 발생할 수도 있지만, 항상 같은 얼굴은 아니다. 만일 같은 얼굴의 사고가 반복된다면, 그건 시스템이 망가진 결과이며, 누군가에게 그 죄를 물어야 하는 사건이다. 따라서 2024년 6월24일 경기 화성시 리튬 배터리 제조공장에서 발생한 화재는 사고가 아닌 사건이다. 그 사건으로 23명이 숨지고 8명이 다쳤다. 사망자는 중국동포 17명, 라오스인 1명, 한국인 5명이었다. 또 이주노동자가 피해의 중심에 있었고, 사망자 중 20명은 사내 하청노동자였다고 한다.
가장 위험한 현장에 또 하청업체 소속 이주노동자의 죽음이 반복되었다. 제대로 된 안전교육 및 대책이 마련되어 ‘있었더라면’이라는 해묵은 가정도 위선처럼 들린다. 모두가 알고 있지 않았던가. 그저 그 익명의 대상이 누가 될지 모를 뿐 반드시 산업재해 사망자의 수치는 어김없이 채워질 운명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제 더 이상 이주노동자 사이에서 한국이 왜 3D가 아닌 4D(Death가 추가)의 나라로 알려져 있는지 설명이 필요해 보이지 않는다.
‘밥줄’을 찾아 이국땅에서 온 이주민들은 그것이 ‘목숨줄’이었는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같은 곳에서 근무했던 이주노동자들은 비상구가 어디 있는지 모른 채 일했으며, 단지 ‘안전하게 일하라’라는 통상적인 말만 들었을 뿐이라 증언한다. 이제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이야기도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배려와 존중의 대상이 노동자가 아닌 기업에 맞춰져 있는 한 똑같은 얼굴의 사망 사건은 반복될 테니 말이다. 무서운 건 이것을 멈추려는 노력보다 나만 아니길 바라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모습과 어찌할 수 없었던 일이라고 무던하게 반응하는 모습들이 한국의 일상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이런 것이 바로 문화적 팩트다.
이번 사건을 보며 떠오른 또 다른 팩트는 밥의 상징적 의미가 노동자에게 차별적이라는 데 있다.
가장 먼저 ‘밥줄’은 노동자에게 어떤 의미일까. 더럽고, 위험하고, 고되고, 사고사가 많다 하더라도 이게 ‘밥줄’이기에 버텨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때 밥줄은 위태로운 생명줄이다. 또 다른 밥은 ‘밥 한 끼’다. 2016년 19세의 나이로 홀로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설치하다 사망했던 청년의 가방에서 컵라면이 발견됐다. 당시 그 허술한 밥 한 끼도 제때 먹지 못했다는 사실이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이때 밥 한 끼는 허락되지 않는 휴식이자 여유일 테다. 마지막으로 노동자의 밥에는 ‘밥값’이 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노동현장에서 밥값을 하라는 질타를 욕설과 함께 듣고 있을까. 과로죽음에 대해 다룬 김영선의 <존버씨의 죽음>에서 작가는 한국의 ‘밥값’에는 ‘욕값’도 포함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이제 목숨값도 포함된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노동자에게 너무 싼 밥값을 지불하며 밥 한 끼 제대로 먹을 여유도 주지 않고, 밥줄을 손에 쥔 채 위태로운 일상으로 내몰면서 목숨마저 위협하는 것은 너무나 잔인하지 않은가. 지금처럼 이 똑같은 얼굴의 사건들이 반복되는 것을 보고 있자니 여전히 모두가 노력한다면 언젠가 좋은 삶이 펼쳐질 것이라 낙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이 ‘잔인한 낙관’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온 것일까. 목숨값이 담긴 밥값이 잔혹한 현실임을 매번 목격하면서, 무엇이 모두를 이처럼 담담하게 만들었을까.
미국 영문학자 로런 벌렌트의 책 <잔인한 낙관>에는 우리의 감각중추가 역사를 학습했기 때문이라 답한다. 벌렌트는 일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강렬한 느낌들이 압도적 역할을 한다고 강조한다. 그 느낌의 실체는 바로 일상의 위태로움이다. 그러한 일상으로부터 학습된 감각이 바로 무관심이다. 나아가 발전도 후퇴도 아닌 그 ‘답보상태’-재난과 참사가 반복된 일상-에 오히려 적응하는 것이 되레 희망이 되어버린 현실! 그것이 잔인하지만 우리의 현실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우리에겐 또 다른 밥이 있다. 지난 6월28일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 이상은님의 부모님은 딸의 27번째 생일에 맞춰 무료 식사나눔을 실천했다. 밥값이 없어 밥 한 끼의 여유를 갖지 못하는 청년들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딸 대신 제공해준 것이다. 그 현장에서 먹은 김치찌개는 참으로 따뜻했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밥 한 그릇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강렬하고 희망적인 느낌을 상실한 채 산다. 그렇지만 밥은 언제나 따뜻할 수 있다. 모든 노동자가 차별없이 잔인한 밥값이 아닌 따뜻한 밥 한 그릇을 상상할 수 있도록 무뎌진 일상의 감각을 깨트려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