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적진에 보내달라!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미국 동인도함대 사령관 페리가 개국을 요구하자 일본은 패닉에 빠졌다. 에도 시민들의 눈길은 미토노공(水戶老公)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에 쏠렸다. 그는 존왕양이의 스타 정치가였지만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번주 자리에서 내려온 인물이다. 당황한 막부는 하는 수 없이 그를 기용했다. 도쿠가와는 개국을 완강히 반대했지만, 흥미로운 주장을 펼쳤다. 미국의 요구를 거절하고, 대신 자신을 미국에 사절단으로 파견해달라는 것이었다. 요시다 쇼인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미국은 일본을 협박하지 말고, 이번에는 물러나라. 그러면 일본이 캘리포니아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개국을 논의하겠다’는 것이었다.

메이지 정부가 1868년 수립된 후 최대의 과제는 조선과의 수교 문제였다. 청과는 이미 조약을 맺었지만(1871) 조선은 8년 동안 국교 수립을 거절해왔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해외순방 중 정부 운영을 책임지게 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는 1873년 7월29일 또 한 명의 실력자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에게 편지를 보낸다. 5년을 끌어오던 조선과의 국교 협상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때였다. 사이고는 조선에 갑자기 군대를 파견하면 전쟁이 날 거라며 “사절을 먼저 파견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렇게 하면 저들이 (사절단에) 폭거를 일으킬 것이 뻔하므로 칠 명분도 설 거라고 생각합니다. (…) 사절단을 파견하면 폭살당할 것으로 예상되니 부디 저를 보내주실 것을 엎드려 바랍니다. (…) 죽음 정도는 각오하고 있으니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썼다. 이어 8월17일자 편지에서는 “전쟁을 곧바로 시작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고, 전쟁은 2단계로 해야 합니다. (…) 사절이 폭살당할 것은 틀림없는 일이므로, 그때는 천하가 모두 토벌해야 할 (조선의) 죄를 알게 될 것이니, 내란을 바라는 마음으로 밖으로 옮겨 국가를 흥하게 하는 원략”(<自由黨史> 상)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쯤 되면 국교 성사를 위한 사절단이라기보다는 전쟁을 유발하려는 전사의 모습이다. 운요호 사건이 발생하자 메이지 정부 최고실력자 중 한 명인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는 1875년 10월4일 태정대신 산조 사네토미(三條實美)에게 사절로 조선에 가서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상서했다. 당시 정부는 기도를 대표로 하는 개혁파와 시마즈 히사미쓰(島津久光) 중심의 보수파가 격렬하게 충돌하는 상태여서 기도가 한양에서 만약 교섭에 실패한다면 기도도 개혁파도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었다. 이에 개혁파의 중진이자 같은 조슈번(長州藩) 출신의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기도를 극력 만류하고, 대신 자신이 부사(副使)로서 강화도로 향했다.

이처럼 죽을 자리(?)에 스스로 뛰어들려는 거물들의 행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먼저 조선과의 외교는 철저하게 국내 권력투쟁과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이고의 정한론 정변은 말할 것도 없고 기도도 조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함으로써 정적을 제압하려는 심산이었다. 훗날 권력에서 밀려나기 시작하자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통감을 자청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또 하나는 적진에 맨 먼저 뛰어들어 공훈을 세우고자 하는 사무라이 정신이다. 위에서 소개한 사이고의 서한을 보면 이들은 전쟁과 외교를 별로 구분하지 않는 듯하다.

구한말 한양 주재 일본공사관의 움직임에 대해 읽다보면 상식적인 외교관 모습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명색이 외교관이란 사람들이 소시(壯士·일종의 정치깡패)들과 긴밀히 연계돼 있기도 하고, 주재국 쿠데타에 병력을 동원하기도 한다. 이들은 이름만 외교관이지 아직 사무라이이며 외교가 아니라 전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명성황후 시해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도 이런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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