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정’이라는 말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송혁기의 책상물림]‘역정’이라는 말

영조가 취약한 출신을 딛고 왕위에 오른 지 4년째 되던 어느 날, 송인명은 경연에서 “끝을 잘 맺으려면 시작을 잘해야 한다”라는 <서경> 구절을 풀이하며 당나라 문종의 사례를 거론했다. 문종은 환관의 전횡을 바로잡으려 애썼지만 집권 초기에 일어난 변란으로 기세가 꺾여서 요절하고 말았다. 영조가 뜻대로 되는 일이 없고 마음대로 다스려지지 않는다고 해서 혹 문종처럼 주눅 들지 않을까 우려된다며 건넨 권면이다. 영조는 무릎을 치며 말한다. “나의 속마음 그대로다. 한밤중에 이런 생각이 들면 너무나 못마땅해서 세속의 말로 역정이 나곤 한다.” 당론을 없애고자 하는 자신의 진심을 신하들이 몰라주고 따르지 않는 상황을 개탄하는 말이다.

영조가 ‘세속의 말(諺所謂)’이라며 입에 올린 ‘역정(逆情)’은 한문에서 ‘거역하고자 하는 마음’의 의미로 쓰여온 말이다. “역정을 품다”, “역정이 탄로되다” 등의 용례에서 알 수 있듯이 본디 종이 주인에게, 백성이 왕을 향해서 가지는 분노의 감정이다. “시어머니에게 역정 나서 개 배때기 찬다”는 속담에 어울리는 말인데, 이를 왕인 영조가 구사한 것이다.

언어의 사용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법, 오늘날 ‘역정’이 윗사람의 분노를 점잖게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는 것은 문제될 게 없다. 다만 그 역정을 내는 사람의 지위가 높고 영향력이 클수록 그로 인한 고통과 혼란 역시 가중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사적 영역을 넘어서 합리성과 시스템으로 결정되어야 할 일들이 특정인의 감정에 따라 흔들리는 조직은 정상이 아니다. 연일 대통령의 역정이 뉴스에 오르내리는 국가 역시 마찬가지다.

앞서 인용한 <서경> 구절은 폭군 걸왕을 유폐시킨 뒤 후세의 평가를 두려워하며 부끄러움을 느끼는 탕 임금에게 중훼가 고한 말인데, 이렇게 이어진다. “예의 바른 자를 높이고 포악무도한 자를 내쳐서 천도를 공경해야 천명을 보전할 것입니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만이 추호도 부끄럽지 않은 떳떳함을 유지할 수 있다. 전전긍긍하던 초기의 영조는 신하들과 함께 이 대목을 읽으며 사욕 없는 밝은 덕에 공감했다. 자기 마음을 미루어 사람을 등용하고 잘못을 고치는 데에 인색하지 않았던 탕왕을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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