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이 아름답다

김해자 시인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작은 것이 아름답다
이웃들, 벗들, 새와 달과 양철지붕에 내리는 빗소리와 별과 나무 그리고 텃밭의 벌레와 채소들과 찾아오는 손님들과 지고 뜨는 해와 꽃등처럼 내건 곶감과 마당의 꽃들과 아침 고요한 차 한 잔과 처마 끝 풍경소리와 계절마다의 비바람과 함박눈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네

또한 깊은 밤 자꾸 방안으로 기어 들어오는 개울물 소리와 푸른 하늘과 따뜻한 장작더미와 삶의 뜨락을 쓸어 주는 인연의 빗자루와 혼자 먹는 밥상의 쓸쓸함과 그 밥상 위의 장식이 되어 준 생명들과 내 안의 웃음과 미움과 분노와 눈물과 슬픔과 사랑들께 깊이 허리 숙이네 가엾은 내 몸과 영혼이여 고마워요 거듭 감사드리네

- 시 ‘인사말’, 박남준 시집 <어린 왕자로부터 새드 무비>


흙을 깊게 갈아엎지 않아도 되는 농사법을 실험 중이다. 산마늘이나 아스파라거스 같은 귀족 식물은 물론이려니와 꽃나물이라 불리는 삼잎국화나 울릉도취라 불리는 부지깽이와 곰취 등 나물이 주종이다. 그 애들은 아무리 잎을 잘라먹어도 죽지 않고 다시 돋아난다. 인간보다 약한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구나 싶다.

부추는 물론이려니와 일년 중 반 이상을 뽑아먹는 대파나 쪽파와 상추도 실험에 착수했다. 윗부분은 잘라먹고 흙 털고 뿌리를 좀 다듬어 심어놓기만 하면 자기들이 알아서 번식해간다. 그중 우리 토종이라는 삼종대파는 놀랍다. 대파 곁에서 새끼가 나오는데 작지만 기세 하나는 등등하다. 신기하고 놀라워 한참씩 들여다보곤 한다.

데치고 말려서 궁채를 만들어보려고 굳세진 상추대를 자르다 상추꽃을 발견했다. 몇 줄기 따다가 물병에 꽂았더니 변신하는 게 볼만하다. 꽃받침이 받친 꽃망울은 입을 꼭 다문 연둣빛 아기 색연필이다. 해가 뜨면 좁쌀알 같은 망울에서 노란 꽃잎 여럿을 꺼내, 나 꽃이오 하고 얼굴을 내민다. 해가 뉘엿해지면 노란색 크레용이 되어 입을 다문다. 쌈잎에만 눈이 어두워 잎 이후는 여태 보지 못했구나. 보면서도 보지 못한 것이 상추꽃뿐이랴.

‘남순이’라 불리는 박남준 시인은 별명에 걸맞게 국수도 잘 말고 차도 잘 덖고 수도 앙증맞게 잘 놓는다. 물론 뜯어진 옷도 직접 수선해 입는다. 새와 꽃 이름도 모르는 게 없다. 궁금하고 신기해서 오래 들여다보니 알아졌겠지.

박남준의 시 ‘하소연하다’에는 소설가 한창훈의 품평이 나온다. 박남준 시는 집 주변을 넘지 않는다는 게 총평이다. 세목은 “마당의 풀꽃 이름과 나무 둬 그루로 운을 떼고/ 텃밭의 채소와 벌레를 엮어/ 어눌한 말투처럼 풀어놓다가/ 새와 나비 등의 권속으로 간을 맞추면 /얼추 끝난다”이다.

‘어린 왕자’라고도 불리는 박남준 시인은 새와 달과 개울물과 버들치는 물론 “텃밭의 벌레와 채소들”에게도 말을 건다. “꽃등처럼 내건 곶감과 마당의 꽃들”과 “비바람과 함박눈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는 시인은 어린 왕자처럼 이 지구별에 불시착한 사람 같다. 30년 이상 산 밑 오두막 같은 집에서 옛사람처럼 먹고 입으며 살아가는 시인에게 현대문명의 속도는 담 밖 이야기겠다.

근대문명의 속도와 규모가 갖는 폭력성을 경계한 경제학자 슈마허는 “인간은 작은 존재이므로, 작은 것이 아름답다” 했던가.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을 먹여살리지 못하는 부자들의 거대기술을 거부하며 방향 전환을 모색했던 슈마허는 전문가들보다 인간주의적 관점을 가진 보통 사람들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본질적으로 폭력적이며 생태계를 파괴하고 인간성을 망쳐놓는 대량생산 대신 대중의 손과 발만이 민주와 공생을 실현할 수 있음을 간파한 것이겠다.

밥숟가락을 뜨다 “혼자 먹는 밥상의 쓸쓸함과 그 밥상 위의 장식이 되어 준 생명들”에게 감사드리는 사람을 보며 평화를 느끼는 밤이다.

똑똑하고 명예로운 사람들 속에서 자주 피로함과 어지러움을 느끼고 명예가 멍에로 여겨지는 건 왜일까. 쓸모없어 보이고 다소 이상하고 작은 존재들이 감동과 위안을 주는 건 무엇 때문일까. “깊이 허리 숙이”며, “가엾은 내 몸과 영혼”에게 “거듭 감사드리”는 이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김해자 시인

김해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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