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안다는 것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이름은 전조라는 말이 있다. 이름을 듣는 순간 우리 몸과 마음이 동시에 반응한다. 좋아하는 음식 이름을 들을 때 마음이 저절로 따뜻해지고 입에 침이 고인다. 싫어하는 음식 이름을 듣는 순간 낯이 찌푸려진다.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그리움이 물안개처럼 번져오고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마음 가득 불쾌함이 몰려오고 몸이 굳어지게 하는 사람이 있다. 이름은 구별을 위한 기호이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개별성에 눈을 뜬다는 말이다. ‘고양이’라는 일반 명사는 어떤 동물 종을 지칭하지만 ‘톰과 제리’라는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톰’은 우리에게 특별한 기억을 환기시킨다. 이름은 늘 어떤 맥락과 함께 떠오른다. 특정한 장소에 대한 기억은 그곳에서 인연을 맺었던 누군가와 더불어 피어난다.

아기들은 태어난 지 18개월 무렵부터 맥락과 이름을 연결하는 인지적 능력이 커진다 한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가 더 이상 객관적 무정물로 존재하지 않음을 뜻한다. 여러 해 전 어느 가을날 교회 마당가에 있는 살피꽃밭에 무심한 눈길을 던지고 있는데, 다방구 놀이를 하던 아이들이 술래를 피해 꽃밭으로 뛰어들곤 했다. 홀로 뒤처졌던 아이 하나를 불러 꽃밭으로 인도했다. 아이는 야단을 맞을 줄 알고 다소 긴장한 표정이었다. 수줍게 피어 있는 분꽃을 보며 다정하게 물었다. “이 꽃 이름 아니?” “아니요.” “이건 분꽃이야.” 아이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검은색 열매 하나를 따서 아이의 손바닥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한번 으깨볼래?” 아이가 열매를 으깨자 하얀 젖빛 배젖이 드러났다. “밀가루 같지?” “네.” “이건 옛날에 엄마들이 분처럼 바르기도 했대. 그래서 분꽃이라는 이름이 붙었어.” 자리를 떠났다가 30분쯤 후 다시 마당으로 나가자 어여쁜 풍경이 펼쳐졌다. 아이는 제 친구들을 살피꽃밭으로 인도하여 자신이 취득한 정보를 친구들과 공유했다. 꽃 이름을 아는 순간 살피꽃밭은 아이들에게 특별한 장소가 되었다. 아이들은 더 이상 꽃밭으로 뛰어들지 않았다.

1990년 한국에서 열렸던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 대회의 참가자들이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쓰다가 순교한 이들과 박해받은 이들을 기억하는 예배를 드렸다. 많은 이름들이 호명되었다. 예배를 이끌던 이가 회중석에 앉아 있는 이들을 향해 “우리가 함께 기억해야 할 또 다른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잠시 주저하던 이들은 한 사람이 자기 나라 순교자의 이름을 큰 소리로 호명하자,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역사가 기억해야 할 이름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침묵의 공간 속에 울려 퍼지는 다양한 이름들. 그들은 더 이상 죽은 사람 혹은 갇힌 사람이 아니라 거대한 역사가 이루는 심포니의 한 부분으로 그 자리에 참여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외경심과 연대감이 사람들을 하나로 묶고 있었다.

어떤 사건 혹은 사고를 통해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이들을 보며 우리는 안타까움을 표하곤 한다. 그와의 연대를 표하기 위해 사고 현장에 꽃을 놓기도 하고, 결코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선명했던 아픔의 기억은 시간과 함께 빛이 바래고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삶을 계속한다. 그날의 예리했던 아픔의 모서리가 깎여나가 둔각을 이루고, 더 이상 아픔의 기억 속에만 머물 수 없다는 실리적 태도가 고통을 익명화한다. 고통이 익명화될 때 옛 물결이 새로운 세상의 꿈을 삼켜버린다.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고통의 익명화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다.

언론에서 자주 언급하는 정치인들의 이름을 떠올린다. 그들의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누군가는 환호하고 또 누군가는 진저리를 친다. 차라리 악평을 듣는 게 잊혀지는 것보다 낫다는 속설에 반응하는 것일까? 거친 말과 표정으로 자기 존재를 드러내려는 이들이 많다. 그런 이들로 인해 정치에 대한 혐오 정서가 깊어간다. 자유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역사의 흐름을 퇴행시키려는 이들의 이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역사의 심판이 아닐까?

이름은 전조이다. 이름값을 하며 살고 싶다.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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