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인공지능(AI)이 얼마나 많은 것을 바꾸고 있는지. 내가 맡고 있는 대학교 문학 글쓰기 강의에서는 특히 난감하고 까다로운 문제다. 교재에는 AI에 관해 필수적으로 가르치게 되어 있지만, 학생들이 제출한 리포트가 챗GPT로 쓴 것은 아닌지 검사해야 하고, 어떤 학생들은 AI에 대해 나보다 훨씬 많은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이 한창 변화하는 와중에 무언가를 규정해서 지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최대한 안전하고 윤리적인 선을 찾으려 노력하지만 강의를 마친 뒤 당부를 덧붙이게 된다. 이것은 현재 시점의 가이드라인입니다. 언제라도 상황은 바뀔 수 있어요.
실제로 AI의 예술적 창작 능력에 대한 전반적인 분위기나 전문가들의 태도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인상이다. 예전에는 AI의 도움을 엄격하게 제한했다면 최근에는 유연하게 수용하는 쪽으로 말이다. 인간의 존엄성이나 창의성을 내세우는 주장은 시대에 뒤떨어져 보이는 반면 기계가 제공하는 새로운 방법론에 열려 있는 입장은 세련되어 보인다. 누군가는 AI의 창작을 생물학적인 돌연변이에 비유한다. 생명체의 돌연변이는 지배적인 개체군에서 장애로 받아들여지지만 이렇게 예측되지 않은 출현이 더 나은 능력을 창조하기도 한다는 이론이다. 최근 한국 문학에서는 AI의 예술 창작을 다룬 주제가 심심찮게 등장할 뿐만 아니라 아예 작가가 챗GPT와의 협업으로 집필했다고 밝힌 소설이 발표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팽창하고 있는 예술 창작에 관한 AI 담론에서 질문은 비슷하게 반복된다. 인간이 나은가, AI가 나은가? AI가 인간보다 뛰어나다면 인간은 대체될 것인가?
그러나 인간과 기계의 능력을 경쟁시키는 것만이 AI에 관해 사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향은 아니다. 얼마 전 내한한 소설가 테드 창은 ‘AI, 인공물, 예술’이라는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언어는 감정과 의도를 바탕으로 하는 의사소통 체계를 의미하는데, 챗GPT는 어떤 주관적인 감정이나 의도 없이 텍스트를 모방하기만 하기 때문에 언어적인 발화라고 할 수 없다. 우리가 문학을 비롯한 예술에 감동받는 이유는 주관적인 의도와 실패를 통한 창작 과정 때문이므로 기계가 대체할 수 없다. 얼핏 기계보다 인간이 더 뛰어나다는 주장 같지만 중요한 것은 AI 담론의 초점을 창작 경쟁이 아닌 감상 체험의 문제로 옮겼다는 것이다. 책을 읽지도 않는 시대에 창작자나 독자는 AI가 쓴 글을 정말 원하는가? 아니, AI가 만든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기는 한가? 광고를 통해 이미 천문학적인 돈을 벌고 있는 AI 회사만이 자극적인 호기심을 부추기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애초에 우리가 글을 읽고 예술을 감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테드 창은 우리가 예술에서 정말 바라는 것은 인간보다 뛰어난 기계의 능력에 대한 감탄이 아니라 무수한 선택과 의도로 이루어진 누군가의 고유한 경험이라고 답한다. 그러나 답이 하나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인류가 축적해온 예술사의 갱신일 수도 있고, 감상 과정에서 누군가와 연결되었다는 기쁨일 수도 있으며, 이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믿음일 수도 있다. 좋은 예술은 언제나 우리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밀어주니까. 그렇다면 예술을 감상하는 이유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야말로 중요할지 모른다. 우리는 각자 나름의 이유로 훌륭한 예술에 감동받고, 그 감동을 통해 삶이 변화되는 체험을 하며, 그 체험이야말로 대체불가능한 감상의 경험이라는 사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