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김민기의 향년

며칠 전, 케이블에서 <변호인>을 보게 되었다. 예전에 극장에서 보았지만 이런 영화를 만나면 또 꼼짝할 수 없게 된다. 이제 영화에 대해서 굳이 더할 말은 없지만 <변호인>에서 건진 단어가 하나 있다. 영화 초반부, 국밥집 주인(김영애)은 건설일용직 단골손님(송강호)의 얼굴이 영 아닌 것을 보고 한마디 던진다. “니 얼굴이 와 이리 축상이고?”

영화는 급박하게 전개된다. 돼지국밥집 아들 진우가 독서모임을 하다가 국가보안법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것이다. 욕조가 딸린 어느 건물 어느 방에서 자행되는 잔인한 고문. 그곳은 축사와 다름없고 짐승 같은 자들에 의해 진우의 몸은 구겨지고 망가진다.

축상(畜相)? 짐승의 얼굴? 영화를 보는 내내 축상이 어른거렸다. 단순히 얼굴만이 아니라 그 짐승 같은 시대 속 우리의 모습을 한마디로 축약하는 말이기도 하겠다. 축상은 국어사전에 없는 단어다. 생각해보니 죽상이란 말일 것도 같았다. ‘거의 죽을 것처럼 괴로운 표정’을 뜻하는 말. 그 ‘죽상’을 국밥집 아지매가 진한 사투리로 발음해서 축상일까. 그렇다고 굳이 확인할 건 아니었다. 이미 축상은 나의 귀에 꽉 들어맞는 의미를 획득했다. 영화 속에서, 뉴스 속에서 횡행하는 축상들은 차고도 넘친다. 윤회의 메커니즘은 잘 모른다만 다음 생에 목숨을 받는다면 꿀꿀거리고 빌빌거리는 축생계에 떨어져야 마땅할 축상의 인물들.

사흘 전, 강원도 대관령의 검푸른 하늘 사진과 함께 문자가 왔다. “가수 김민기가…ㅠㅠ ” 그 시절 신체의 구속을 당한 적도 있고, 그때 극장에서 <변호인>을 함께 보며 눈물도 많이 흘린 친구가 보낸 것이었다. 한 생이 임무를 벗고 이승을 떠날 때 지팡이처럼 의지하는 말은 여럿이다. 거개 언론은 ‘별세’란 말을 덤덤하게 붙이고 있었다. 그 부고 기사에서 유독 마음이 가는 한 단어가 있다. 김민기라서, 김민기이기에 그랬다. ‘향년 73세’라고 할 때의 그 향년(享年)이다. 그가 걸어온 길이 저 두 글자에 보였다. 김민기의 향년은 누렸다기보다는 겪었다고 하는 게 옳겠다. 저 축상의 시대를 헤쳐오느라 다소 무뚝뚝해 보이는 김민기의 얼굴. 슬픔이 인생의 친척이라면 노래는 일상의 부품이다. 헐거워진 사람의 마음을 나사처럼 조여주고 붕대처럼 감아줬던 김민기의 노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Today`s HOT
영국 공군대학에서 퍼레이드를 준비하는 윌리엄 왕자 허리케인 프랜신으로 파손된 미국의 한 매장 태풍 야기로 경찰의 도움을 받는 미얀마 주민들 베네수엘라 청년당 창립 기념 행사
9.11테러 추모식에 참석하는 조 바이든 대통령과 해리스 후보 브라질 원주민의 망토 반환을 축하하는 기념식
허리케인 프랜신으로 폭우가 내리는 미국 볼리비아 산불을 냉각하고 있는 사람들
싱가포르 환영식에 참석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산불로 타버린 캘리포니아 마을 태풍 야기로 인한 홍수로 침수된 태국 치앙라이 네덜란드 해방에 기여한 사람들의 묘지를 방문한 사람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