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성큼걸이’ 이야기를 했다. 성큼걸이는 J R R 톨킨의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인물 ‘아라곤’(혹은 ‘아라고른’)의 별명이다. 작중에서 아라곤은 본래 곤도르 왕가의 후손이지만 혈통을 숨긴 채 오랫동안 떠돌이로 생활한다. 순찰자로 지내는 시기에는 큰 키로 성큼성큼 걷는다며 ‘스트라이더(strider)’라고 불린다. 그리고 스트라이더가 성큼걸이라는 한국적인 명칭으로 변하는 과정에는 약간의 사연이 있었다.
저자인 톨킨은 언어학을 깊이 파고들었던 사람답게 소설에 나오는 언어를 매우 공들여 만들었다. 작중 요정들이 쓰는 ‘퀘냐(높은요정어)’나 ‘신다린(낮은요정어)’은 고유한 글자, 문법, 발음, 단어를 갖추고 있다. 인공어치고 완성도가 높은 덕에 우리는 제대로 익히기만 하면 요정어로 의사소통할 수도 있다(한국에는 팬이 제작한 요정어 학습지가 나온 적이 있는데, 여타 외국어 학습지처럼 글자부터 일상회화까지 차근차근 안내하는 구성이었다).
설정상 <반지의 제왕>은 소설 속 공용어로 쓰인 책을 톨킨이 번역한 것이다. 가령 ‘빌보 배긴스’란 이름은 서부공용어로 표기하면 원래 ‘빌바 라빙기(Bilba Labingi)’다. 그러나 톨킨은 의미를 고려하여 작중의 호빗에게 영어식 이름을 주었다. 적어도 그렇게 했다는 설정이다. 다만 공용어가 아닌 언어나 특정 고유명사는 바꾸지 않았다. 그래서 톨킨의 소설에는 ‘신다린’처럼 현실에 없는 단어가 빈번히 등장한다.
<반지의 제왕>을 번역하는 사람들은 톨킨이 다듬은 체계 앞에서 혼란을 겪어야 했다. 이에 톨킨은 번역자가 지켜야 할 상세한 지침을 마련했다. 공용어 부분은 의미에 따라 번역하고 변형할 대상에 해당한다. 그렇게 ‘미들어스(middle-earth)’는 한국어로 ‘가운데땅’이 되었다. ‘빌보 배긴스’는 한때 그대로 쓰였지만 다른 번역본에서는 ‘골목쟁이네 빌보’였다. 그렇다면 일관성을 위해서는 ‘strider’ 역시 바뀌어야 한다. 문제는 톨킨의 지침은 유럽어권을 중심으로 작성되었다는 점이다. 유럽 내에서라면 ‘strider’는 번역해도 형태가 크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어로는 얼마나 ‘국내화’를 해야 할까? 성큼걸이는 그런 고민의 산물이다.
미국의 영문학자이자 번역가인 로렌스 베누티는 번역할 때 ‘이국화(foreignization)’ 작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흔히 번역가는 텍스트가 처음부터 자국어로 쓰인 것처럼 읽히도록 말을 매끄럽게 다듬는다. 다듬는 수준이 높아질수록 원문의 이질적 요소, 문화적 차이, 고유한 매력은 점차 지워진다. 그렇기에 번역가는 어색함을 남겨두어 원문의 색깔을 보존할 필요가 있다. 언어에 담긴 차이를 존중하기 위해서, 독자를 낯선 곳으로 보내기 위해서.
그런데 한국어 입장에서는 ‘국내’와 ‘이국’의 자리가 바뀐다. 우리는 영어가 실질적으로 우위를 점한 상황에 던져져 있고, 수많은 텍스트가 영어를 중심으로 편성된 모습을 본다. 따라서 한국어 번역은 지나치게 이국화된 텍스트를 알맞게 손질하는 작업일 수 있다. 낯설어야 하는 부분을 낯설게 보존해야 하듯, 일상적이어야 하는 부분은 일상 언어로 구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큼걸이냐 스트라이더냐, 그런 오래된 논쟁에 새삼 허우적거리고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