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내용이 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시의적절한 기획에 따라, 훌륭한 이야기를 갖추고, 고품질로 제작한 드라마와 예능은 결국 성공할 수 있다는 요지를 담은 주장이다. 여기서 성공이란 많은 시청자 수와 그에 따른 높은 수익률만 뜻하는 게 아니다. 당대는 물론 후대까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문화적 성취를 포함한다.
애초에 그 말은 드라마나 예능 제작의 가치생산성을 강조하는 정도로 제기된 게 아니었다. 우리나라 매체산업의 전환기에 플랫폼 사업과 비교해서 내용제공 사업이 중요하다는 주장과 함께 유행했던 말이다. 내가 2010년경 한 방송사업자의 정책전략 세미나에서 그 말을 처음 듣고, 즉각 반박하기 위해 꺼냈던 말이 ‘내용이 왕이면 플랫폼은 여왕’이라는 표현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억지스러운 비유지만, 나로서는 어쨌든 진심을 담은 주장이었고 그래서 이렇게 되묻기도 했다. 왕과 여왕이 붙으면 누가 이길까요.
구독형 동영상 플랫폼의 지배가 예사롭지 않다. 흔히 오티티라고 부르지만, 오티티가 무슨 뜻인지 전달하려면 셋톱박스를 무력화한 매체기술부터 말해야 한다. 그리고 셋톱박스의 문제를 말하려면 지상파 무료방송, 즉 ‘프리투에어(free-to-air)’ 방송의 가능성과 한계를 설명해야 하니, 오티티니 뭐니 발음하며 침 튀기기도 귀찮다. 말줄임에 유연한 젊은이들의 어법을 따라서 그저 ‘구동플’ 정도로 부르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그것은 우리 삶에 이미 깊숙이 들어와 있다.
나는 지금 플랫폼 사업자가 내용제공 사업자를 기술과 혁신, 규모와 유량에서 압도하는 현실을 상기하려는 게 아니다. 매체산업에서 플랫폼 지배의 역사는 유구하다. 혁신 기술을 도입한 매체사업자가 등장해 과거 다른 방식으로 유통하던 내용물을 그 매체의 양식으로 전용하면, 기존 내용제공자들이 혁신 매체를 등에 업고 새로운 독자나 시청자를 찾아 나서는 일들은 반복해서 벌어졌던 일이다. 19세기 말 대중신문의 지면을 채우는 데 온갖 종류의 문예물과 시각물이 활용되고, 20세기 중 24시간 다채널 유선방송의 요구에 맞춰 온갖 종류의 영상물을 공급했던 사정들이 대표적이다.
지금 구동플, 아니 구독형 동영상 플랫폼 때문에 동시대적 공감 경험이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당신과 취향과 신념이 비슷한 시민은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이 플랫폼이 아니면 저 플랫폼에서라도, 당신이 보았던 그 드라마나 예능에서 느꼈던 그 재미와 감동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지연된 선택을 통해서 누적적으로 강화된 공동시청 경험은 플랫폼이 채택한 알고리즘에 의해 주로 이루어지지만, 실은 ‘요즘에 뭘 보냐’고 물은 당신의 질문이 씨앗이 되어 나중에 맺어진 결실일 수도 있다. 개인적 시청경험은 비슷한 취향과 신념으로 공유되고 있고, 월정 구독료를 감당할 수 있는 계층적 소비역량으로 제한된 뚜렷한 초점을 갖고 있다.
그래서 묻게 된다. 지금 방송통신위원회와 국회 과방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난리의 정체는 도대체 뭔가. 지상파 텔레비전 시청경험이 혹시라도 진보 또는 보수로 기울어질까봐 염려해서 공영방송 지배구조를 놓고 벌어지는 이 정신없는 싸움은 정말이지 하찮게 보인다. 이 싸움에 동원된 말을 들어보자. 구독형 동영상 플랫폼을 둘러싼 기획제작과 판권구매 관련 사업자들 간의 수싸움이나, 드라마 추천과 구독자 확보 전략을 지배하는 혁신 기술의 침투력과 비교해서 저열하다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다. 우리 사회 진보든 보수든 중산층의 시청경험은 이미 지상파 방송편성과 무관하게 형성되고 있다. 공영방송 이사장이 누가 되고 사장이 누가 된들 시민의 주된 정보원이 바뀔 것 같지도 않다. ‘플랫폼 대항해 시대’에 방송채널 몇개의 편성권자를 놓고 이 난리를 치고 있다니 믿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