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먹고 자고 쉬는 곳이며, 투자의 대상이자 노후 대비 자산이기도 하다. 이미 살고 있는 집의 가격은 더 오르길 바라고, 아직 내집을 마련하지 못했다면 정체하거나 떨어지기를 바란다. 집값이 급등락하면 모든 시민이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부는 가격이 오르면 낮추기 위한, 떨어지면 올리기 위한 대책을 내놓기 마련이다.
정부가 지난 8일 ‘국민 주거안정을 위한 주택공급 확대 방안’(8·8 부동산 대책)을 발표했다. 최근 집값 상승세를 잡기 위해 주택공급을 늘리겠다고 밝힌 것이다. 국토교통부 장관은 “2029년까지 6년간 서울·수도권 우수 입지에 42만7000가구 이상의 우량 주택이 공급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대책이 나온 지 열흘이 넘도록 집값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일부 지역에 투기 조짐마저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부동산 대책의 약발이 먹히지 않는 경우는 흔하다. 정책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때 역효과가 나는 게 보통이다.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한 정책도 시장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8·8 대책은 재건축·재개발 촉진과 빌라·오피스텔 등 비아파트 시장 정상화 등을 담았지만, 핵심은 수도권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 해제였다. 서울과 인접 지역 그린벨트를 풀어 8만가구를 공급하겠다는 계획이다.
대책을 발표한 날 서울과 경기 하남시의 그린벨트 135.75㎢가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됐다. 그린벨트 해제 발표가 나오자마자 강남권 공인중개사무소에는 그린벨트 인근 토지에 대한 문의가 이어졌다. 그린벨트 인근 기존 아파트와 빌라는 급매물이 사라지고 있다. 그린벨트에 아파트가 신축되면 그만큼 기반시설이 개선돼 인근 기존 주택의 가격도 오르는 게 일반적이다.
대책의 효과가 나타나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지금까지 시장은 거꾸로 반응하고 있다. 8월 둘째주 서울 아파트값은 21주 연속 강세를 나타내며 약 6년 만에 최대 상승폭을 기록했다. 한국은행이 20일 발표한 소비자동향조사 결과를 보면 8월 주택가격전망지수는 전달보다 3포인트 오른 118이었다. 지수가 100을 웃돌면 집값 상승을 예상하는 소비자가 많다는 뜻이다. 118은 문재인 정부 시절 ‘집값이 미쳤다’고 했던 2021년 10월(125)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그린벨트는 도심의 허파로 불린다. 공기질을 개선하고 도심 온도를 낮추며, 미세먼지 차단 효과도 있다. 국토의 70%였던 한국의 산지는 각종 개발 탓에 지금은 60%를 겨우 넘을 정도로 쪼그라들었다. 녹지가 점차 사라지는 상황에서 그린벨트는 후대를 위해 보전하는 게 바람직하다. 정부는 그런 그린벨트에 집을 짓겠다고 했다. 뛰는 집값을 잡기 위한 초강수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린벨트 해제와 관련해 얼마나 고민했는지 궁금하다. 그린벨트 보전을 주장하는 환경 부처나 시민사회단체, 전문가 집단이 있지만 협의 소식은 듣지 못했다.
정책은 신뢰가 생명인데, 추진 과정이 불투명하니 효과를 낼 수 없다. 경향신문 기사 <정책 만들면서 기록 남기지 않는 정부, 왜?>(2024년 8월19일자 11면)를 보면 정부 각 부처는 의대 정원 증원 등 주요 정책 현안을 결정하면서 회의록을 작성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정책 결정이 협의와 토론, 숙의를 거치지 않고 이뤄진다.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듯하다. ‘채 해병 사건’도 최고 결정권자의 몇마디 호통이 진실을 가리고 있다.
그린벨트 해제는 누군가에게 특혜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윤석열 대통령 부부를 향한 의혹의 시선이 적지 않다. 국민의 이익보다 본인들과 가까운 특정 세력의 이익에만 관심을 갖는다는 비판에 근거한 의혹이다. 이미 서울~양평 고속도로 종점 변경 특혜 의혹이 불거진 바 있다.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기 어려워졌다. 불신이 팽배해서는 아무리 좋은 정책도 실효를 거둘 수 없다.
지난 문재인 정권에서 부동산 정책 실패 책임을 뒤집어쓰고 있는 김수현 전 정책실장은 책 <부동산과 정치>에 “이 책에 비사(秘史)는 없다. 대한민국은 이미 자연인 누군가가 결단하거나 지시해서 정책이 결정되고 집행되는 나라가 아니다”라고 썼다. 하지만 몇몇 자연인이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듯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현 정권은 임기의 절반 이상을 남겨두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대다수 시민이 불행한 시대를 살 수밖에 없다. 정책 추진 과정을 투명하게 밝히고 시민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