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마 미쓰로와 옥잠화

이선 한국전통문화대 명예교수

주말마다 오르는 인왕산 자락길에 옥잠화가 피었다. 꽃잎이 백옥같이 흰 옥잠화는 봉오리가 옥비녀(玉簪)와 똑같다. 깨끗하고 유려한 꽃 모습이 아름다워 정조와 다산도 옥잠화에 대한 시를 지었다. 최남선, 홍명희와 함께 조선 3대 천재로 평가받던 가야마 미쓰로도 옥잠화를 사랑했다.

1940년 2월20일자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그는 ‘창씨(創氏)와 나’라는 제목으로 창씨개명에 대한 자신의 분명한 의지를 밝힌다. “나는 일본인이 되는 결심으로 성을 향산(香山)이라고 하고 이름을 광랑(光郞)이라고 하였다. 내 처자도 모조리 일본식 이름으로 고쳤다. (…)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성과 이름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 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향산광랑이 조금 더 천황의 신민답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광수는 가야마 미쓰로(香山光浪)가 되었다.

2·8 독립선언부터 창씨개명 권고까지, 암울한 시대에 춘원만큼 제국과 식민지 사이에서 널뛰기한 인물도 드물다. 창씨개명 천명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41년, 잡지 ‘삼천리’에 그는 옥잠화 단상을 실었다. 화분에 옥잠화를 길렀던 그는 어느 날 꽃이 활짝 핀 옥잠화를 보고 감탄하면서도 애처로워했다. 화분의 흙이 좋지 못했을 뿐 아니라 거름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틈틈이 물을 준 덕분에 꽃이 핀 거라며 겸연쩍어했다. 또한 그는 ‘도무지 가꾸지 않아 가느다랗고 키만 큰 국화가 꽃이나 제대로 필 수 있을까’ 걱정하였다. 부실한 꽃 기르기를 되돌아보면서, 그 생각이 자식에게까지 번져갔다. “심신이 변변치 못한 자의 씨로서, 게다가 훈육도 못하니 저것들이 자라서 어찌 될까?” 그가 주장한 ‘민족개조론’을 고려할 때, 그의 생각은 양화(養花)에서 훈육을 넘어 교민(敎民)으로까지 투영된 모양새다. 그러나 그가 ‘나태하고 비겁하며 표리부동’하여 꽃이나 제대로 필 수 있을지 의심했던 우리 민족이 죽지 않고 살아남아 이처럼 만개하는 상황을 그때는 어찌 알 수 있었으랴.

옥잠화 단상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갖은 부정(不淨)이 꽉 차고 찌들고 결어서 좀체로 이 생(生)에는 청결이 될까 싶지도 아니하다. ‘아버지는 이렇지마는 너는 이러지 말아라.’ 나는 이런 소리를 자식들에게 여러 번 하였다. 그런 망신이 어디 있을까.” 자식들에게 모범이 되지 못했던 그의 자조적 반성이 혹여 지금의 우리에게 전하는 당부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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