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내 이름은 청자예요. 푸를 청을 써요.” 하명희의 단편 <청자의 노래>에 등장하는 대사다. 작중 ‘청자’는 반지하에 사는 가난한 사람이다. 그는 밤무대 가수, 노래방 도우미를 전전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낙천적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청자의 아이가 새로 전학한 학교의 학부모들은 그런 청자를 따돌리며 말조차 섞지 않으려 한다. 가난한 청자와 ‘선’을 긋고 싶어한다.
한집에 사는 작중화자는 그런 청자를 집에 초대해 커피를 내어주며 다정한 말을 건넨다. 그리고 자신 또한 본명이 무엇인지 선언을 한다. “내 이름은, 내 이름도 춘자야. 봄 춘 자를 써. 나도 내 이름이 싫었어. 숨기고 싶더라고.” 그러자 청자가 화답한다. “춘자래. 청자랑 춘자. 우리 둘을 합치면 청춘이네”라고 말한다. 이렇게 우애로운 공동체, ‘청춘’의 연대가 탄생한다.
위 소설은 하명희 소설집 <고요는 어디 있나요>(북치는소년 2019)에 수록된 작품이다. 위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하명희는 우리 시대 가난의 경로와 가난의 문법을 가장 잘 이해하며 능숙하게 구현할 줄 아는 작가다. 최근 출간한 소설집 <밤 그네>(교유서가 2024)에는 상실과 고립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곁’을 내어주려는 작품들이 여럿 수록되었다. 근래 읽은 소설 가운데 다정한 마음이 왜 소중하고, 우리 사는 세상을 다정한 공동체로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조용히 역설하는 작품이다. 다정한 공동체의 성분이란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었다.
표제작의 <밤 그네>는 이태원 참사 당시 딸과 남편을 잃은 희생자가 등장한다. 골방에서 광장으로 좀처럼 나가지 못하던 작중인물이 ‘세상 속으로’ 나아가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이 잘 그려져 있다. <다정의 순간>에는 참사 후 10년이 지났지만, 트라우마를 온몸으로 앓는 세월호 피해자가 등장한다. 그렇게 고립에 처한 인물들은 어떻게 세상 속으로 다시 ‘입사(入社)’하는 걸까. 하명희는 곤경에 처한 누군가에게 다정히 ‘손’을 내밀고, 다정한 ‘말’을 건네는 이웃들 덕분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작품 속 성대 앞 풀무질 서점, 경기 광주시 퇴촌 도서관 같은 안식처 같은 공간은 그런 점에서 ‘숨쉴 틈’이자 생크추어리(sanctuary)라고 부를 수 있다.
하명희는 특히 글쓰기의 윤리에 대해 섬세하게 자문자답한다. 나는 “요즘에는 다정, 다정함에 대해 자주 생각해요”라는 대사에서 보듯이, 누군가에게 곁을 내어주려는 있어줌의 윤리가 필요한 것 아니겠느냐고 조용히 말한다. 우수마발의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누구나 비범(非凡)한 각자의 페이지와 각자의 문장이 있다는 점을 어느 소설가의 장례식 풍경을 통해 감동적으로 그려낸다(<모르는 사람들>).
아직 날이 덥고 불쾌지수는 여전히 높다. 날씨 탓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 시대 ‘공기’가 무겁기 때문일 것이다. 조용한 듯 이상한 활력이 느껴지는 하명희 소설을 읽으며 다정한 공동체의 성분을 다시 생각한다. 어느 철학자는 “민주주의는 우리가 가진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하고 있는 무엇이다”(파커 J 파머)라고 말했다. 하명희가 그려낸 일종의 ‘인문대피소’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나는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한다. 아름다운 것들을 지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