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2023년 광복절 기념사. “공산전체주의 세력은 늘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 왔습니다.” 올해 광복절 기념사에서는 가짜 뉴스를 상품으로 포장하여 유통하는 사이비 지식인들이 “국민을 현혹하여 자유 사회의 가치와 질서를 부수”며 “선동과 날조로 국민을 편 갈라, 그 틈에서 이익을 누리는 데만 집착”한다고 비난한다. “이들이 바로,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반자유세력, 반통일세력입니다.” ‘을지 자유의 방패’ 첫날인 올해 8월19일 국무회의 발언. “우리 사회 내부에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반국가세력들이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시민 언어’를 안 쓰고 ‘군사 언어’를 쓴다. 시민 언어는 수천 년의 문명화 과정을 겪으며 인류가 함께 만든 민주주의 언어다. 이 언어는 초월적인 이상으로 시민사회의 제도를 통해 실현된다.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는 제도는 초월적인 민주주의 이상을 실현하는 시민 제도다. 이 제도의 꼭대기에 있는 대통령은 민주주의란 성스러운 가치를 수호한다. 그런데 대한민국 대통령이 군사 언어를 쓴다. 군사 언어는 국가주의자의 언어다. 국가의 존재 이유를 현 존재 양식을 위협하는 적의 규정에서 찾는다. 주어진 현실의 삶을 절대화하기에 이상이 지닌 초월성을 버리고 당대 국가의 절대주권을 맹종한다.
부끄러움은 원초적인 사회적 감정이다. 자신의 자아를 돌아보고 다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공적 얼굴을 되찾도록 이끈다.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사회성을 상실했음을 뜻한다. 대통령이 군사 언어를 쓰면서도 친사회적 감정인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 사실이라면 대통령 개인은 물론 한국 민주주의에도 커다란 불행이다. 대통령의 죽마고우로 알려진 이철우 교수. “대통령 주위에 역사에 대한 이상한 견해를 부추기는 이들이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강원도지사 김진태가 지난 광복절 기념식에서 한 말. “국가가 되려면 국민이 있어야 되고 영토가 있어야 되고 주권이 있어야 되는 3요소가 있어야 됩니다. 국민은 그렇다치고 주권이 없지 않습니까?” ‘일제시대’의 국적이 일본이라고 대놓고 말하던 독립기념관장 김형석. 지난 26일 국회에 출석했는데, 1945년 8월15일을 광복절로 인정하느냐는 질문에 답변을 거부했다. 같은 날 인사청문회에 나온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 김문수가 목소리를 높인다. “일제시대 때 무슨 한국 국적이 있었습니까? 나라가 망했는데 무슨 국적이 있어요.” 일제가 절대주권을 휘두르는 현실 앞에 모두 ‘천황의 신민’이 되었다는 말이다.
막스 베버의 ‘정통 제자’로 조롱받은 칼 슈미트는 적과 친구를 규정하는 절대주권의 힘을 강조한다. 전통과 단절하여 근대 독일국가를 만들고자 했는데, 법에 제한되지 않고 마음대로 기적을 행하는 초월적 유일신을 모델로 했다. ‘히틀러의 왕실 법학자’ 노릇을 한 이유다. 정작 베버는 다르게 말한다. “전통으로부터의 의식적인 이탈은 원래 거의 전적으로 예언적 신탁이나 적어도 예언적이라고 승인되어 성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선언에 기인했다.” 임시정부 수립 때 발표한 축하문. “우리 국민은 다시 이민족의 노예가 아니요 또한 다시 부패한 전제정부의 노예도 아니요 독립한 민주국의 자유민이라.” 노예적 삶을 강제하는 전통에서 단절하여 근대의 독립 민주국의 자유민으로 살아가겠다는 예언적 신탁이다. 당장 임시정부가 절대주권을 휘두르지 못하는 경험적 현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한다. 예언적 신탁은 이를 믿고 헌신한 사람들에 의해 마침내 실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독립한 민주국의 자유민’을 굳게 믿고 목숨 바친 선조를 이어받아 성스러운 선언을 현실로 만드는 일은 국가주의의 망령에 맞선 후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