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자꾸 ‘처리수’라고 부르나

이정호 산업부 차장

친구의 정의는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이다. 동료는 ‘같은 조직에서 함께 일한 사람’이다. 비슷한 느낌이 있기는 해도 두 말의 의미는 헷갈리지 않는다. 사용 대상이 달라서다. 일상에서 “코흘리개 시절부터 50년 동안 우정을 나눈 고향 ‘동료’입니다” 또는 “업무적으로 손발이 잘 맞는 직장 ‘친구’입니다” 같은 어색한 문장을 쓰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정치권에서는 최근 어떤 용어 선택과 관련해 어색하고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달 24일 국민의힘 대변인 논평의 첫 문장은 ‘오늘은 후쿠시마 오염처리수 방류가 시작된 지 1년이 되는 날입니다’였다. 오염수가 아니라 ‘오염처리수’라는 용어를 썼다. 지난달 22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최고위원회의에서 “후쿠시마 원전 처리수가 방류된 지 1년 정도 지났다”고 말했다. ‘처리수’가 등장했다. 오염처리수나 처리수는 최근 국민의힘에서 일상 용어가 됐다.

하지만 야당에서는 후쿠시마 오염수라는 표현을 예나 지금이나 일관되게 사용한다. 심지어 정부도 마찬가지다. 국무조정실이 지난달 28일 배포한 언론 대상 자료를 보면 제목 자체가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관련 브리핑’이다. 브리핑 처음부터 끝까지 처리수라는 용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처리수든 오염수든 호칭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말은 특정 상황의 의미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의 공식 용어인 처리수는 후쿠시마 원전에서 나오는 방사성 오염수를 정화하도록 만들어진 ‘다핵종제거설비(ALPS)’의 힘을 강조하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그런데 일본 정부도 인정하듯 ALPS는 ‘삼중수소’라는 방사성 물질은 ‘처리’하지 못한다. 걸러내지 못한다는 뜻이다. 삼중수소가 남은 오염수는 어떻게 할까. 바닷물과 섞어 태평양에 방류한다. 오염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옅게 만드는 것이다. 오염수라는 본질은 그대로다. 너그럽게 봐줘도 ‘희석 오염수’다. 듣는 이에게 오염 물질이 제거된 것처럼 느끼게 하는 처리수는 현 상황을 객관적으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도 국민의힘이 처리수라는 용어를 구태여 고집하는 이유는 뭘까. 후쿠시마 오염수에 대한 문제 제기가 ‘가치 외교’의 한 축인 한·일관계 개선을 막는 요인이 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일 공산이 크다. 가치 외교가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는 안보 이익 등을 위해 오염수에 대한 부정적인 국내 인식을 개선하는 것이 여당의 역할이라고 봤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염수와 처리수가 가진 서로 다른 말의 의미를 고려할 때 국민적 공감대나 합의 없이 용어 전환을 은근슬쩍 시도하는 것은 당당하지도 않고 온당치도 않은 일이다.

국민의힘이 할 일은 따로 있다. 일본의 현 상황을 직시하는 것이다. 2011년 원전 폭발 이후 처음 시도된 핵연료 잔해 반출 시도가 지난달 기술 문제로 실패했다. 핵연료 잔해는 방사성 오염의 근원이다. 880t이나 후쿠시마 원전 안에 쌓여 있다. 다 치우지 못하면 오염수는 계속 발생한다. 잔해가 너무 많고, 신속히 치울 방법도 마땅치 않아 오염수 발생 기간이 금세기를 넘길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지금은 오염수에 대한 넓은 이해가 아니라 일본 정부에 핵연료 잔해 제거 대책을 내놓으라고 다그치는 일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한다.

이정호 산업부 차장

이정호 산업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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