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악의 왕은 누구일까? 많은 사람들은 선조를 생각할 것이다. 그는 임진왜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이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당시의 이승만처럼, 백성들을 버리고 혼자 도주했고 이순신 징계에 바빴던 한심한 왕이다. 나는 ‘고종도 선조 못지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최근 들어 고종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고, 한말이 나의 전공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고종의 긍정적인 면이 그가 서구제국주의가 동아시아를 위협하던 19세기 말에 무능해서 나라를 빼앗겼을 뿐 아니라 외세와 봉건적 모순, 자신의 실정에 저항해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하게 군대를 보내달라고 청나라에 구걸한 역사적 죄를 덮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를 핑계로 일본군이 한반도로 쳐들어왔으니 스스로 일본군을 끌어들인 것이다. 물론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나는 고종의 무능과 잘못된 대응이 19세기 말 우리 민족이 비극으로 치달아야 했던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요즈음 동아시아는 19세기 말과 비슷한 중요한 기로에 놓여 있다. 21세기 패권을 놓고 벌어지고 있는 ‘미국 대 중국’의 패권전쟁이 그것이다. 이는 대한민국과 한반도의 미래가 걸린 심각한 문제로, 우리의 지정학적 위치 등을 고려할 때, 우리가 미국과 같이 하더라도 지혜와 신중함에 기초한 ‘어느 정도의 균형외교’가 필요하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미·일 동맹에 올인함으로써 동북아를 ‘한·미·일 대 북·중·러’의 대결로 몰고 가는 데 앞장서고 있다. 특히 윤 정부는 미·일 동맹을 강화하는 데 걸림돌인 일본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친일’적이고 굴욕적인 양보를 계속하는 한편 역사 관련 요직에 일본극우 논리에 동조하는 ‘뉴라이트’를 중용하고 있다. 한 예로,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로 미뤄져 왔던 일본 사도광산의 유네스코문화유산 등재가 윤 정부의 굴욕적인 양보로 최근 성사됐다. 대법원이 배상판결을 한 강제동원 문제에 대해 윤 정부가 사실상 면죄부를 준 것이다. 오죽했으면 미국의 외교전문지 ‘디플로매트’가 이번 결정으로 한·일 양국이 사도광산의 “외교적 역사적 의미를 심각하게 왜곡해 사도광산의 어두운 면을 은폐하고 있다”고 비판했겠는가.
나아가 다른 곳도 아니고 독립운동을 기리는 독립기념관 관장에 광복회 등 독립운동단체들이 ‘뉴라이트’라고 비판하는 인사를 임명해 광복절 행사가 두 동강 나고 말았다. 이처럼 국민적 저항이 커지고 있음에도 윤 대통령은 자성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내부에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반국가세력들이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신공안논리로 대응하고 있다. 군사독재나 하던 ‘반국가세력 타령’을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하다니 충격적이다. 자신의 멘토였던 이종찬 광복회장이 독립기념관 관장 인사 등에 극렬하게 반대한 것을 보니 ‘광복회에서 암약해온 반국가세력’인 것 같다는 뜻인가? 그럴 리가 있겠는가. ‘친일노선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가뜩이나 울고 싶은 국민들의 빰을 때렸다. 그는 “마음이 없는 사람을 억지로 다그쳐 사과를 받아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냐며 “중요한 것은 일본의 마음”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는 “윤 정권에게 중요한 것이 국민의 마음이 아니고 일본의 마음이냐?”는 반발을 낳고 있다. 김 차장은 그동안 “일본이 한반도 유사 사태에 개입하는 걸 기정사실화하는 것은 평상시 대북억제력을 증대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해 왔기 때문에, 윤 정부 임기 내에 유사시 일본군의 한반도 개입을 공식화하려 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19세기 말과 비교할 때, 표면적으로만 보면, 윤 정권의 ‘친일 행각’은 동학혁명 진압 등을 중국사대주의에 기댔던 고종이 아니라 친일 노선의 김옥균 등 개화파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김옥균 등은 최소한 대내정책에서는 신분타파 등 개혁적이었다면, 윤 대통령은 철 지난 반국가세력 타령이나 하는 등 ‘퇴행적’이다. 깊이 들여다보면, 대외적으로도 윤 정부의 입장은 고종과 유사하다. 고종이 동학진압 등을 일본이 아니라 중국에 의존하려 했지만 당시 조선이 의존하던 ‘패권국’은 중국이었다. 윤 정부는 고종과 달리 중국이 아니라 미·일에 의존하려 하고 있지만, 해방 이후 지금까지 우리가 의존해온 패권국은 미국이었다는 점에서 고종의 행보와 유사하다. 윤 대통령이 ‘잘못된 자기확신’에 빠져 21세기 동북아의 격동에서 대한민국을 비극으로 몰고 가는 ‘21세기의 고종’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잘못된 확신에 찬 지도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