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 한국전통문화대 명예교수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면 이미 군내부터 난다. 이때는 허접한 훈계나 치졸한 영웅담일 경우가 많다. 대화란 주고받는 것인데, 지위나 나이를 무기 삼아 상대방 이야기는 듣지 않고 자기 말만 앞세우면 일방통행일 뿐. 서로 통하지 않는 대화는 답답함만 남는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격식과 품위를 갖춘 만남은 오래 기억된다. 450여년 전 임경당 김열과 율곡 이이가 그럴 것이다.

강릉에 터전을 둔 김열은 율곡의 고향 어르신이자 강릉 십이향현 중 한 사람이다. 향교 교관으로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향리 처사로 남아 경서 강독에 전념하였다. 조상 대대로 살던 그의 집 뒷동산에는 선친이 심고 가꿨던 소나무 숲이 있었다.

그 숲을 아꼈던 김열은 자손들이 잘 지키면서 교훈 삼을 수 있도록 율곡에게 한 말씀 부탁했다. 마침, 율곡은 병환이 깊은 외조모 봉양차 잠시 강릉에 내려왔다가 그를 찾아온 참이었다. 당시 김열은 63세, 율곡은 33세였다. 임금의 총애를 받던 율곡도 고향 어르신께는 깍듯이 예를 갖춰 응했다.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 율곡의 <호송설(護松說)>에 전해진다.

자손들이 솔숲을 보양하기 원했던 김열은 “그대의 몇 마디 말을 얻어 가묘의 벽 위에 걸어 자손에게 보이려 하오”라며 정중히 청하였다. 율곡은 “말 몇 마디가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라면서도 “생전에 부모님께서 쓰시던 물품은 그분들의 손때와 입김이 묻은 것이므로 감히 사용할 수 없는 것처럼, 손수 심으신 소나무는 후손들이 오죽 잘 관리하겠습니까”라며 후손을 걱정하던 김열을 위로하였다. 그러면서 율곡은 “소나무를 심은 지 수십 년을 기다려서야 비로소 큰 나무로 성장하였는데 도끼로 벤다면 하루아침에 다 없어질 것이니, 가업을 이루기는 어렵고 파괴하기는 쉬운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니겠는가!”라고 김열의 후손들에게 당부하였다.

환갑이 넘은 김열이 젊은 율곡을 대하는 정중한 기품이나, 젠체하지 않고 곡진한 태도로 김열의 청을 받아들인 율곡에서 대화의 품격을 가늠할 수 있다. 사실 나는 소나무보다 노소와 지위를 초월해 마음을 터놓은 두 사람에게 더 감동하였다. 겸손하면서도 패기 넘치는 젊은이 되기도 어렵지만, 너그러우면서도 쿨한 어르신 되기도 쉽지 않다.

추석에는 온 가족이 모인다. 상대방에 대한 깊은 이해가 전제되어야 진정한 대화가 통한다. 세이공청(洗耳恭聽)이라, 남의 말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귀담아듣는 태도야말로 대화의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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