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해방정국의 갈등을 설명하면서 좌우익의 갈등이 비극을 낳았다고 말하지만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좌익 내부의 갈등과 우익 내부의 갈등이 좌우익 사이의 갈등보다 더 심각했고 더 적의(敵意)에 차 있었으며 잔혹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해방정국을 더욱 비극의 길로 몰아갔다는 점이다.”
원로 정치학자 신복룡이 최근 출간한 <해방정국의 풍경>에서 한 말이다. 그는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주간조선’에 한국 현대사 관련 글을 연재했는데 “좌우익 모두로부터 십자포화를 맞았다”고 한다. 이 글을 읽는 순간 해방정국의 언론인이자 중간파 지식인이었던 오기영이 ‘신천지’ 1946년 11월호에 쓴 “경애하는 지도자와 인민에게 호소함”이라는 제목의 글이 생각났다. 그는 이 글에서 좌우는 싸움으로 세월을 허비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개탄했다.
“나는 실상 아직 ‘공산당선언’조차 똑똑히 읽어본 일이 없는 사람인데 공산주의자라는 말을 우익 측 지인으로부터 듣는 이유는 우익 정당에 가입하지 않은 것과 우익의 비(非)를 비라고 한 까닭 이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는 나를 기회주의자라, 심하게는 반동분자라는 비난을 좌익 측 지인으로부터 많이 듣고 있는데 이것도 내가 좌익 정당에 가입하지 않은 것과 좌익의 비를 비라고 한 까닭 이외에 아무 이유도 없습니다.”
그랬다. 그런 시절이었다. 전생에 원수였던 것처럼 싸우는 좌우 어느 한쪽을 선택을 해야 욕을 먹건 테러를 당하건 그것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었다. 오기영은 “과연 오늘의 조선인 지도자는 앞으로 무엇을 먹으며 정치를 하려는 것인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지만, 증오의 선전·선동에 있어서 정치인보다 더 큰 책임을 져야 할 쪽은 언론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사흘만 각 신문이 정치기사를 일제히 휴재(休載)하면 정치가는 반성할 것이요, 통일할 수 있을 것이다.”
8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음에도 달라진 게 없다는 걸 절감하게 된다. 물리적인 폭력은 사라졌다는 점에선 그간 이루어진 사회적 진보에 감사드려야 하겠지만, 단지 그것뿐이다.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생각이 다른 세력에 대한 증오는 건재하고 자신의 옳음과 정의로움에 대한 확신은 더욱 강해진 것 같다. 생각이 같은 사람끼리 공감을 나누고 증폭시킬 수 있게 해준 디지털 기술의 ‘축복’ 때문이겠지만, 이 모든 과정과 메커니즘이 먹고사는 문제와 결부돼 ‘직업화’되었다는 점에선 ‘저주’라고 하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다.
탈진영 행보는 명예지 흠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런 ‘진영 전쟁’에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무소속으로 참전하는 신복룡 같은 지식인이 있다는 게 위안이 된다. 그의 글이 보여주는 최대 장점이자 매력은 그 어떤 틀에도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그로 인한 시련은 있지만, ‘진영’의 정해진 모범답안 굴레로부터 자유롭거나 자유로워지려 애쓰는 사람이 매우 드문 세상에서 그의 탈(脫)진영 행보는 명예지 흠이 아니다.
신복룡은 “해방정국의 희생자들 가운데 대부분은 이념이 다른 적대 세력의 손에 희생된 것이 아니라, 우익은 우익의 손에 죽었고 좌익은 좌익의 손에 죽었다”며 “같은 이데올로기 집단 안에서도 (강경파는) 중도 온건 노선을 배신이나 변절 또는 기회주의자로 보려는 극단적 도그마와 성숙하지 않은 이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설명도 덧붙인다. “사막에서 전갈은 방울뱀을 만났을 때보다 동종의 전갈을 만났을 때 더 치열하게 싸운다. 이종(異種) 사이의 싸움에는 불리하다 싶은 쪽이 도주하지만, 동종의 싸움에는 물러남 없이 죽음으로 끝난다.”
공감하거니와 동의하지만 좌우 내부의 갈등이 더 심각한 이유에 대한 설명으로선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 그렇다’는 동어반복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프로이트는 ‘사소한 차이에 대한 나르시시즘’이란 답을 제시했지만, 이건 답이라기보다는 그런 현상에 대한 작명(作名)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좀 보완해보자. ‘승자독식’의 차이로 설명해보는 건 어떨까. 우리는 치열한 좌우 싸움에 대해 승자독식이 문제라는 말을 자주 하지만, 이 경우의 승자독식은 강조를 위한 과장법일 뿐 문자 그대로의 승자독식은 아니다. 10을 놓고 나누어 갖는다면 어떤 분야에 속하느냐에 따라 4·6제나 3·7제나 2·8제의 분배율로 승자가 훨씬 더 큰 이익을 가져간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게 옳다. 반면 진영 내에서 주도권이나 노선을 놓고 벌이는 싸움엔 그런 여유가 없다. 이건 문자 그대로의 승자독식이다. 좌우 싸움에선 패배한다 해도 진영 내에서 먹고살 길이 많지만, 진영 내 싸움은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 실질적으로 죽느냐 사느냐의 싸움이다.
이른바 ‘정치군수업자’, 즉 “극단적, 일방적으로 자기 편에 유리한 선동을 하며 금전적 이익을 챙기는 언론이나 유튜버 등 소위 ‘진영 스피커’들”(표창원)을 들어 설명하는 게 좋겠다. 이들은 어떤 정권이 들어서건 자기 진영 내에서 변함없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그들이 자기 진영 내의 최고 권력자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한다면 한순간에 몰락하게 돼 있다. 정치 담론 시장은 진영 내 최고 권력자 중심으로 형성돼 있어 단골 고객이 다 떨어져 나가기 때문이다. 치어리더에 불과한 정치군수업자의 이름만으로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꾸려나갈 수는 없는 법이다.
‘배신·변절’ 오남용은 비판받아야
좌우 진영 모두 자신들의 패권에 도전하는 내부 비판자들에겐 ‘배신·변절’ 딱지를 붙여 고립시키는 매카시즘 수법을 즐겨 쓴다. 신의는 사적 인간관계에선 가장 중요한 덕목이기 때문에 ‘배신’이라는 딱지는 공사(公私) 영역을 초월해 공포와 더불어 증오·혐오의 감정을 불러올 수 있는 무서운 말이기 때문이다. 매카시즘이란 무엇인가? 공산주의가 웃음거리가 된 오늘날엔 뜻도 예전과 달라졌다. “일반 대중의 공포·증오·혐오를 유발할 수 있는 딱지 붙이기를 통해 특정인이나 세력을 사회로부터 고립·추방시키려는 정치 공작”으로 정의하는 게 무방할 게다.
‘배신·변절’을 팔아먹는 매카시즘은 타협에 적대적이다. 미국 언론인 맷 타이비는 <우리는 증오를 팝니다>라는 책에서 “우리는 정치란 타협을 수반할 수 있거나 수반해야 하는 행위라는 걸 전혀 알지 못하는 세대를 키웠다”며 “우리는 독자와 시청자 대신 팬을 길들이고 있었다”고 했다. 한국에선 세대를 초월한 팬덤정치가 기승을 부리면서 타협이 더러운 단어 취급을 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타협을 적대시하는 사람들이 무슨 지고지순한 원칙의 신봉자라서 그런 게 아니다. 자신의 진영 내 패권에 대한 이의 제기를 원천봉쇄하면서 패권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한 속셈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팬덤을 흥분시켜 광분하게 만드는 데에 가장 강력한 수단이 바로 ‘배신·변절’ 타령이기 때문에 그런 광분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는 타협은 멀리할수록 좋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관련, 전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2019년 어느 대담에서 아주 멋진 말을 했다.
“순수에 대한 관념, 당신은 절대 타협하지 않을 것이고 정치적으로 항상 각성해 있다는 인식. 여러분은 이런 인식을 빨리 극복해야 합니다. (중략) 소셜미디어는 이런 인식을 증폭시킵니다. 세상은 혼란스럽습니다. 모호함으로 가득합니다. 좋은 사람들에게도 결점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적들도 자기 아이들을 사랑할 겁니다. 타인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면 할수록 많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이 젊은이들 사이에 퍼져 있는 것 같습니다. (중략) 타인에게 돌 던지는 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라면, 여러분은 그리 멀리 가지 못할 겁니다.”(경향신문, 백승찬 칼럼 ‘적폐와 중간태’)
지금 우리는 ‘배신·변절’ 딱지를 팔아먹는 매카시즘이 기승을 부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심지어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로 대중적 인기를 얻은 사람이 권력을 잡은 후 ‘배신자 프레임’을 앞세워 “사람에게 충성하라”고 전방위적으로 압박하는 어이없는 일마저 벌어지는 세상이다. ‘배신·변절’ 딱지를 즐겨 쓰는 사람들의 화석화된 두뇌, 독식하려는 심성, 증오로 몸을 떠는 잔인성에 안녕을 고하면 좋겠다. 물론 ‘배신·변절’ 딱지를 꼭 붙여야 할 경우도 있을 게다. 그런 경우를 위해서라도 지금 한국 정치판에 난무하는 ‘배신·변절’ 딱지의 오남용은 비판받아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