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전 쓰여진 과학책 <바다의 가장자리>를 읽었다. 생태학이라는 말이 아직 낯선 시기, 레이첼 카슨은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을 변화시킨 위대한 과학 저술가였다. <침묵의 봄>이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지만 해양생물학자로서 그는 바다 3부작을 저술하며 작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바다의 가장자리>는 그가 쓴 바다 3부작의 마지막 책으로,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경계인 해안을 다룬다.
책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암석 해안, 모래 해안, 산호 해안. 카슨은 각각의 해안이 지질학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곳에서 살아가는 생물은 무엇인지를 섬세하고 성실한 시선으로 소개한다. 책 곳곳에는 펜으로 그린 흑백의 삽화가 삽입되어 있었고 1950년대 독자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마음이 담긴 생물의 분류도 부록으로 달려 있다.
이렇게나 폭력적이지 않은 책은 오랜만이었다. 어떤 메시지도 강요하지 않고 관찰자로서 자신이 본 것만을 전달한다. 목소리 높은 주장, 엄숙한 교훈, 거리에서 주운 지식과 도덕성을 뽐내는 얘기가 널린 세상에서 해안을 관찰하는 내내 느꼈을 경이감마저 자제하며 독자를 기다리는 책을 읽는 경험은 귀했다.
자연을 의인화하지 않고 쉽게 의미를 추출해내지 않기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기도 했다. 선명한 고해상도의 다큐멘터리 영상을 찾아볼 수 있는 지금, 오래전 쓰인 흑백의 과학책을 읽는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일일 수도 있었다. 고요한 것을 오래 바라보는 능력을 잃은 탓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다 책에 푹 빠지게 된 지점이 있었는데, 카슨이 암석 해안 곳곳에서 발견한 조수(潮水) 웅덩이에 대해 서술하는 지점이었다. 카슨은 이런 문장들을 쓴다.
‘가장 아름다운 몇몇 웅덩이는 해안 위쪽에 있다. 이들은 색깔이며 형태, 거기에 비친 상 같은 단순한 요소에서 아름다움을 발한다.’
‘나는 깊이가 10여 센티미터에 불과한 웅덩이를 하나 알고 있는데, 거기엔 온 하늘이 담겨 있다.’
‘찻잔만 한 홈을 채운 아주 작은 웅덩이에도 어김없이 생명체가 살고 있다.’
‘보이는 생명체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마음을 끌었다. 마침내 나는 보이지 않는 것이 그 웅덩이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라고 느끼게 되었다. 히드라충과 홍합은 조수에 실려온 보이지 않는 표류물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흔하디 흔한 물웅덩이가 카슨에게는 아름다움의 정도도 친밀한 정도도 제각각인 존재였다. 파도가 밀려가고 다음 번 파도가 아직 들이치지 않은 막간 동안 카슨은 천장에 매달린 홍합에서, 벽을 뒤덮은 해조에서 작은 은빛 물방울들이 퐁당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결코 고요하지 않은 웅덩이의 웅성거림을 듣는다. 알지 못한 채로 지나쳐버리는 그런 이야기가 매 순간 모든 곳에 도대체 얼마나 많을까?
때때로 거울이나 카메라가 없던 시기의 인간을 상상하곤 한다. 그때 인간이 눈을 감으면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은 나의 겉모습, 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 내가 가진 것들이 아니라 저 멀리보이는 산 그림자나 바다, 주의 깊게 관찰해온 나무, 새, 작은 풀잎, 꽃들, 또 주변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표정과 그들의 걸음거리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겪어본 적 없는 시기를 그리워한다.
자신의 장례식장에서 읽어달라고 했다는 <바다의 가장자리> 마지막장을 읽으며 영원한 바다의 리듬 위에서 투명하고 광활해진 카슨을 본다. 조수와 부서지는 파도, 밀려드는 해류, 바다나 육지가 융기하며 새로운 해안을 만들어낼 때마다 해를 거듭하며 달라지는 생명체의 군집, 가차없이 흐르는 연속적인 생명 속에 카슨을 본다. 어쩌면 시대착오적인 것은 70년 전의 과학책이 아니라 이 세계에 갓 들어온 신참내기이면서도 자신이 겪는 시간만이 전부인 줄 아는 인간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