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희라는 비극 2

구혜영 정치부문장

지난 7월 국민의힘 전당대회 때 불거진 문자 파문은 한국 보수 정치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위임받지 않은 권력이 대통령 직무에 개입한, 비공식 권력이 공식 권력을 정신적·현실적으로 압도한 사건이었다. 당시 나는 ‘김건희라는 비극’의 글에서 윤석열 정권의 실정을 가리는 ‘김건희발’ 불의에 익숙해지지 말자고 했다. 그러기 위해선 처음 불행을 만난 듯 ‘순진한’ 분노가 필요하다고 했다.

김건희 여사가 지난 10일 ‘세계 자살 예방의 날’을 맞아 서울 마포대교에서 마포경찰서 용강지구대 근무자와 함께 도보 순찰을 하고 있다.

김건희 여사가 지난 10일 ‘세계 자살 예방의 날’을 맞아 서울 마포대교에서 마포경찰서 용강지구대 근무자와 함께 도보 순찰을 하고 있다.

두 달 만에 ‘김건희라는 비극’이 다시 등장했다. 이번엔 총선 공천 개입 의혹이다. 김건희 여사가 22대 총선에서 김영선 전 의원에게 지역구를 옮겨 출마할 것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뉴스토마토 보도에 따르면 김 여사 요청대로 출마지를 옮긴 김 전 의원이 공천에서 배제되자 화가 나서 김 여사와 나눈 텔레그램 문자를 현역 의원 두 명에게 보여줬다는 게 핵심 내용이다. 여권은 “허구”라 했고, 김 전 의원도 “김 여사와 문자를 나눈 적 없다”고 했다. 하지만 정치권 일각에선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이 나왔고, 야당도 특검법 처리 때문에 갖고 있는 증거를 내놓지 않는단 말이 들린다. 대통령실과 한동훈 대표 측의 공천 불협화음, 정권 초부터 계속된 김 여사 의혹을 떠올리면 이번 사건을 미리부터 거짓이라고 단정할 이유가 없다. 이쯤만 해도 충분히 심각하고 위험하다.

사실이라면 김 여사는 공적 의사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해 여권 권력지형 변화에 적극 힘을 행사한 셈이 된다. 전대 파문과 달리 실제 정치를 했다고 봐야 한다. 대통령의 조력자가 아닌 사실상 정치 동업자다. 시스템으로 제어되지 않는 내밀한 동업자. 이는 ‘육사 위에 미용사’로 불렸던 이순자 여사와 차원이 다르다. 이 여사는 부정부패 의혹에 연루된 정도였다. 흔히 견주는 최순실 국정농단과도 비교할 수 없다. 최순실은 비선이지만 김 여사는 권력의 원천에 있다. 장악력, 영향력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정당 책임정치의 근간인 공천에 사인이 개입했다면 ‘특별한’ 선거법(후보와 배우자의 동일한 책임) 규정상 명백한 위법이다. 이렇게 공천받은 사람의 문제는 없을까. 그렇지 않다. 오로지 대통령 부부의 눈치만 보면 되는데 정당·정치 발전 따위가 중요할 리 있겠는가. 보수의 정당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게 된다. 당장 “나도 이렇게 당한 건 아닐까”라고 의심하는 낙천자들이 불만의 대오를 형성하면 국민의힘은 갈등과 분열이라는 현실적 위협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한다. 흉흉한 소문이길 바라지만 공천 개입 의혹에 정책책사로 포장된 역술인 이름도 떠돈다. 베갯머리 국정농단도 모자라 제사장의 영감으로 정치가 움직이는, 신정체제로 되돌아간 듯한 착시마저 든다.

한국 민주주의엔 오래된 결핍이 있다. 선출 권력에 대한 취약한 견제, 이로 인한 권력 남용이다. 공적 정당성이 없는 개인(집단)이 공적 의사 결정에 관여한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은 이 차원을 넘어섰다. 후견 민주주의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학계는 “민주주의의 구조적 퇴행” “사실상 비민주주의”로 의견이 갈렸다. 하지만 공천 개입 의혹은 이 구분조차 머쓱하다. 민주적 선출, 공정 선거가 민주주의의 핵심인데 김 여사가 단지 선출된 대통령의 부인이라는 이유로 공천에 개입했다면 이는 민주주의의 본질을 무너뜨린 사건이라는 평가 말고는 빼고 덧붙일 게 없다.

공천 개입 의혹이 지금 올드라이트·뉴라이트 전성시대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 윤석열 정권의 국가운영 방식은 이승만·박정희식 권위주의 국가 모델을 지향한다. 이념적으론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내건 뉴라이트의 깃발을 좇는다. 그렇다면 윤 대통령과 김 여사는 올드라이트·뉴라이트일까. 여권에서조차 “뉴라이트가 뭔지 모른다” “좌파인 것 같다”는 말이 나오는 걸 보면 명확한 정체성은 없는 것 같다. 정권 초부터 “집권 비전·이념이 없다”는 비판을 받은 윤 대통령의 정체성 부재를 올드라이트·뉴라이트 세력이 메우고, 대신 이들은 기득권 위상을 지키는 걸로 관계를 유지하는 양상이다. 그들로선 민주주의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데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중요한 건 오직 ‘권력’일 뿐이다.

정권과 시민(사회) 사이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 공천 개입 의혹은 험하고 깊은 심연이 될 게 분명하다. 김 여사가 지난 10일 서울 마포대교에서 현지 지도를 하는 모습이 공개됐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더 이상 ‘순진한’ 분노로는 해결될 수 없을 것 같다. ‘충분한’ 분노가 필요하다. 곳곳에서 민주주의 감각을 되찾는 훈련부터 해야겠다. 히틀러 독재 시절, 저명한 학자인 하버드대 골드하겐 교수는 “한 시민이 자신의 책임을 권력에 떠넘길 때 역사는 과거로 화석화돼 그들의(권력의) 과오는 완벽히 소멸된다”고 일갈했다. 우리는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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