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길치다. 하필 길눈 밝은 배우자를 만나는 바람에 사사건건 구박받는다. 하루는 길눈 밝은 배우자에 비해 내게 부족한 능력이 무엇인가 곰곰이 고찰해보았다. 일단 나는 방향감각과 거리감각이 부족하다. 한번은 ‘A건물 앞에 B건물이 있다’고 길을 설명해주었는데, 갔다 온 배우자가 투덜거렸다. 거기는 A건물 앞이 아니라 한 구역 떨어진 곳이고, 그 정도 거리는 ‘앞’이라고 설명하면 안 된다고 말이다. 다음으로는 표지물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정말 심혈을 기울이지 않으면, 건물이나 도로 같은 지형지물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니 여러 차례 간 곳도 내게는 매번 새롭기만 하다.
길치로서 나의 부족한 점을 고찰하다가 문득 ‘시간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 개념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면서 습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아이는 어렸을 때 가까운 과거나, 먼 과거나 모두 ‘아까’라는 만능 단어 하나로 설명하곤 했다. 어제 일어난 일도 ‘아까’, 10분 전에 일어난 일도 ‘아까’였다. 내 아이만 그런 게 아니다. 아동 교육 연구에 따르면 사건의 순서나 인과관계 판단 같은 논리적인 시간 개념, 시간의 흐름과 길이를 판단하는 경험적인 시간 개념 등은 8, 9세 정도 되어야 완성이 되며, 문화권마다 다를 수 있는 월, 계절, 한 해 같은 관습적 시간 등의 습득은 시간이 더 걸려서, 대체로 13~14세 정도에 성인 수준에 도달한다고 한다. 중학생 정도가 되어야 온전한 시간 개념을 습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간 개념을 잘 습득하지 못한 사람도 있지 않을까, 그런 사람을 ‘시간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정상적인 발달 과정을 거쳤다면 인간의 생애 안에서 경험 가능한 시간에 대한 개념 정도는 문제없이 갖추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간 개념이 역사라는, 즉 인간의 생애 주기를 훌쩍 뛰어넘는 단위로 넘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100년, 500년, 1000년 이상을 한숨에 놓고 이해할 수 있는 시간 개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장기간의 시간 개념을 읽히려면 우선 길눈을 갖추는 데 필요한 것처럼 표지 인식이 필요하다. 많은 이들이 외우느라 진저리치는 사건의 연표와 인물 등은 이런 표지에 해당한다. 표지가 제대로 서지 않으면, 온갖 역사적 사건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머릿속에 혼란스럽게 떠돌게 된다. 여기에 자기가 살아보지 않은 역사적 시간에 대한 거리감을 익힐 필요가 있다. 이 거리감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하면,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의 일을 모두 그냥 똑같은 ‘옛날’로 인식해버리게 된다. 1990년이나 1960년이나 다 같은 옛날로 취급하는 것은 내 아이가 모든 과거를 ‘아까’라고 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렇게 되면 과거에 대해 왜곡된 상을 갖게 된다.
여기에서 더 어려운 점은 이 역사적 시간의 거리감이 상대적이라는 점이다. 예전에 미국인과 대화하다 “한국에 고추가 들어온 지는 400년 정도밖에 안 됐다”고 무심코 얘기한 적이 있다. 그러자 이 사람이 “400년 정도‘밖에’라고요?”라며 황당해했다. ‘아, 그렇지. 당신은 250년도 안 되는 역사를 지닌 나라 출신이지’ 하고 속으로 피식 웃었다. 물리적으로는 같은 400년이라 해도 그 길이감은 어떤 역사를 학습하느냐에 따라 상대적이다.
이런 난점을 뚫고 역사를 학습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역사의 학습은 개인의 생애 주기를 훌쩍 뛰어넘는 긴 시간을 놓고 지속과 변화, 사건의 인과를 고민하는 방법을 공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직접적 원인이나 결과만이 아니라 좀 더 장기적이고 간접적인 인과관계를 포괄적으로 고찰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는 사고력에 직결된다. 길치는 다행히도 지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나, ‘역사적 시간치’에겐 이런 손쉬운 길잡이가 없다. 어쩔 수 있나. 고차원적인 사고력을 키우고 싶다면 끊임없이 역사를 공부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