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무더운 날 옆방 아주머니(엄마)와 밥을 먹는데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는 그의 세찬 목울대가 시선을 끌었다. 그는 물을 마시고 있었지만, 기실 자랑을 하고 있었다. 내 컵 좀 보라고, 새끼손가락을 높이 치켜들었다. “뭐야, 그게.” 아줌마는 대답 대신 컵을 내밀었다. 그것에 손이 닿자마자 놓쳐버렸다. “읏, 차!” 내동댕이쳐진 컵은 바닥을 도르르 굴러갔다. 아줌마는 하나 놀라는 기색 없이 그것을 주워 들었다. “얼음컵이지.” 망치처럼 그것을 식탁에 쾅쾅 내리쳤다. “어떤 것이든 즉시 시원해지지.” 회심의 미소를 짓더니 능숙한 손짓으로 컵을 까뒤집어 각얼음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을 보여주었다. 얼음컵이자 얼음 트레이였던 거다. 감탄과 무관심에 내가 말이 없자 그가 말했다. “1300원.” 유유히 방으로 퇴장하는 뒷모습에게 물었다. “어, 어디서…?” 문지방 위에 서서 그가 입술을 오므렸다. “테무.”
아줌마는 요즘 테무에 빠졌다. 하루가 멀다고 알 수 없는 회색 봉투가 집 앞에 도착한다. 이곳은 산골이다. 밤이면 귀뚜라미와 고라니 우는 소리가 들리고 낮이면 뱀을 쫓기 위해 손뼉을 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곳. 네온사인이나 광고판이라고는 반경 10㎞ 이내 하나도 찾을 수 없는 곳이다. 이곳에 하루가 멀다고 중국의 신문물이 등장했다. 핑크색 수도꼭지 필터, 충전식 야채 다지기, 화려한 건물처럼 웅장한 채칼, 밭에서 일할 때 신는 밝은 주황색 장화, 사과를 한 번에 깎아주는 동그란 칼, 야채를 담는 빨간 소쿠리…. “그게 뭐야?”라고 물을 때마다 아줌마는 어김없이 입술을 모았다. 처음엔 “아줌마, 테무 왔어”라고 하다가 점점 “아줌마, 테무”가 됐고 언젠가부터 그냥 “테무 아줌마”라고 말하게 됐다. 그렇게 부를 때마다 아줌마는 승자의 미소 같은 걸 지었다.
화려한 등장과는 달리 물건들과의 생활은 생각보다 삐걱거렸다. 세면대는 어쩐지 사용이 더 불편해졌고, 야채 다지기는 충전 단자에 녹이 슬었고, 채칼은 자리를 어마어마하게 차지했다. 사과 깎는 칼은 단 한 번 사용된 뒤에 고이 모셔졌고, 얼음컵은 나에게 자랑한 이후 냉동실에서 나온 일이 없었다. 그럼에도 어김없이 해가 떠오르듯 테무가 도착했고 엄마는 감탄과 한숨을 절반씩 뱉었다. 때로는 그걸 알면서도 기다리는 것 같았다. 품질이 만족스럽지 않아도, 똑같은 것이 여러 개 잘못 와, 심지어 전혀 다른 상품이 와도 문제 삼지 않았다. 나를 그렇게 키웠더라면 아줌마라 부르지 않았을 텐데!
고개를 들어 세상을 보니, 테무에 빠진 것은 엄마만이 아니었다. 사람들 사이에는 테무를 산처럼 쌓아놓고 뜯어보는 ‘테무깡’이 유행처럼 번졌다. 누구는 ‘쿠팡의 위기’라 하고 ‘백만장자 체험’이라 했다. 제품에서 발암물질이 검출됐다는 소문이 돌았고 곧 정부의 제재가 있을 거라는 뉴스가 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람들은 샀다.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필요한 것들이 있었다. 원하는 건 무엇이든 고민 없이 장바구니에 담았다. 곧 ‘진짜보다 허술하고 조잡한 무언가’를 부를 때 테무라는 표현이 쓰였다. ‘15만원어치 테무깡, 성공템은?’을 시청하고 나면 ‘3000만원 내돈내산 명품 하울’이란 영상이 뒤따라 추천됐다.
때로 무언가를 살 수 있다는 것이, 내가 이 삶을 계속 살 수 있다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불분명하지만, 살 수 있는 것과 살 수 없는 것은 언제나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1300원짜리 얼음컵과 1300만원짜리 명품백은 때때로 비슷한 용도가 된다. 이 시대의 소비란 그토록 심오하다. 1300원짜리 얼음컵의 삶의 여정만큼. 1300만원짜리 명품백의 알 수 없는 원가만큼. 시골의 작은 집에 수두룩하게 쌓여 있는 중국의 신문물과, 나이 든 기계치 아줌마가 혼자서 직구를 성공해낸 절묘함만큼. 몇번의 터치가 삶에 가져다주는 요상한 모양의 희로애락만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