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상영되고 있는 영화, 오정민 감독의 <장손>은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작품이다. 1인 가구 시대, 장손(長孫)은 실재하는가. 모든 남성은 생계부양자인가. 가부장제는 누구에 의해 유지되는가. 쇠락하는 가부장제는 왜 여성의 지위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는가….
<장손>은 전통적인 유교적 가부장제를 상징하는 아름다운 고택, 계절의 풍광을 넘치도록 담아낸 화면, 매직 아워(빛이 충분하면서도 인상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해 뜰 무렵이나 해 질 무렵) 촬영이 많은 영상미, 빈틈없는 시나리오, 연기와 연출 모든 면에서 많은 칭찬을 받은 역작이다.
게다가 감독의 ‘주장대로’ <베테랑 2>의 경쟁작이 될 만큼 흥행성도 갖췄다. 대자본이 투입된 시리즈 상업영화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다섯 번 시도한 끝에 지원받은 독립영화가 시장에서 당당히 겨눌 만큼 재미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독립영화의 예산상 한계, 촬영 회차, 계절 촬영 등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감독 자신이 쓴 시나리오대로 할 수 있는 최대치를 뽑아냈다.
공식적인 시놉시스는 다음과 같다. “경상도 지역 어느 마을, 3대 대가족이 모두 모인 제삿날 일가의 명줄이 달린 가업 두부 공장 운영 문제로 가족들이 다투는 와중, 장손 ‘성진’은 그 은혜로운 밥줄을 잇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설상가상 갑작스레 맞닥뜨린 예기치 못한 이별로 가족 간의 갈등은 극에 달하는데…핏줄과 밥줄로 얽힌 대가족의 70년 묵은 비밀이 서서히 밝혀진다!” 그러나 작품은 공식 선전 문구와 거리가 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표현대로 이 영화는 “시작할 때는 제목에서 예상한 것처럼 시작하고, 끝날 때는 당신의 기대보다 더 멀리 간다”.
영화에는 세 명의 장손이 나온다. 일가의 주인인 김승필 할아버지, 그의 아들 태근, 태근의 아들인 현재 장손 성진. 하지만 실제로는 5대가 등장한다. 한국전쟁에서 민간인 학살로 희생된 할아버지의 부모부터 할아버지의 손녀인 미화의 출산 장면까지 5대의 이야기이다. 영화에서는 성별이 안 나오지만 이 집안의 5대인 첫 갓난아이가 ‘딸’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3대 장손인 주인공 성진, 즉 미화의 남동생은 영화계에서 일하는 인물로 나오는데 결혼할 처지도 아니고 의사도 없어 보인다.
여성에 의해 유지되는 가부장제
이 집안에서 기대와 익애(溺愛)를 한 몸에 받은 2대 장손 태근이나 3대 장손 성진은 성역할(생계 부양)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예전에는 이성애 핵가족을 사회의 기본 단위(unit)라고 했지만, 지금 기본 단위는 개인이다. 20대 청년 성진은 받은 것을 돌려주거나 물려줄 것이 없는 세대이다. 당대 자본주의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가부장제를 ‘이긴’ 시스템이다. 만성화된 실업, 저출산(지역 소멸), 1인 가구는 가부장제의 인프라가 사라진 시대의 산물이다. 영화는 더 이상 장손이 존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장손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는 현실을 풍자한다.
나는 이 영화가 ‘장손의 가업 잇기’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두부 공장은 “은혜로운” 가업이 아니다. 영화에서도 장손은 도시에서 출세해야 하는 존재지, ‘시골에서 두부 공장을 맡아야 할’ 사람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두부 공장은 이 가족의 생계 수단일 뿐이다. 일본 문화에서처럼 대대로 이어져온 자랑스러운 가업이 아니다. 할아버지는 아들(2대 장손)이 ‘판사’가 되려면 두부 공장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김씨가 아닌 사위에게 물려주기도 싫다. 3대 장손인 성진의 어머니도 이렇게 말한다. “너는 서울 가서 승부를 봐라, 두부 공장하라고 공부시킨 거 아니다.”
영화는 제례와 상례가 중요한 한국의 유교적 가부장제를 다루지만, 동시에 유교적 가부장제가 얼마나 속물적이고 비인간적인가를 보여준다. 아들들에게는 두부 공장에서 나온 수익으로 ‘출세’를 지원하고, 딸들에게는 아들들이 하기 싫어하는 가업을 맡기면서도 그녀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주거나 이름을 올리려고 하지 않는다. 일은 시키면서도 일하는 사람을 혐오하는, 여성에 대한 이중 메시지를 표현해낸 감독의 통찰이 돋보인다.
2대, 3대 두 ‘K 장녀’는 남동생(태근, 성진)이 하지 않으려는 일을, 자의든 타의든 맡게 된다. 홍보용 시놉시스에 누이가 “두부 공장을 노린다”는 소개가 나오는데, 남동생이 하기 싫다는 일을 누이는 탐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성차별의 실상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주제는 대가족이라는 소우주다. 이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사회적 모순은 매우 다양하다. 젠더, 계급, 이념, 세대, 한국 현대사 등을 모두 아우르고 있지만, 제목인 ‘장손’이나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장손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젠더화된 담론이다. 지금은 독자라고 하면 정말 외동이를 뜻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딸은 자녀로 보지 않기 때문에 태근이 두 명의 누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진이 누이 미화가 있음에도 두 남성을 모두 독자라고 한다. 딸들은 가족 내에서 성원권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 <장손>은 온전히 젠더 영화다. 내게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미화가 남동생 성진에게 제사를 일찍 지내게 해달라고 허리를 쿡쿡 찌르면서 할아버지에게 대신 말하게 하는 상황이다. 사실 장손인 성진은 제사를 몇 시에 지내든 관심이 없다. 이 장면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을 통해 자기 의사를 관철시키는 전형적인 방식을 보여준다. 여성은 가부장 혹은 국가와 직접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남성을 통해 시민권을 획득하거나 자기 의사를 표현한다. 이 영화에서처럼 권력자에게 직접 말하기보다 남성을 통해 즉 남성을 ‘조종’해서 말하는 경우를 일상 문화에서는 “현명한 여성”이라고 한다.
더불어 흥미로운 사실은 딸들은 철저히 출가외인 취급을 받지만, 이 집안을 유지하는 모든 노동은 여성이 한다는 것이다. 집안 일은 물론이고 공적인 일인 두부 공장 노동도 여성의 몫이고, 할머니의 존재는 <장손>을 끌고 가는 동력이다. 가부장제는 남성 중심 사회지만, 그 체제 유지에 필요한 노동은 여성이 한다. 가부장제를 실제로 유지, 작동시키는 이들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다. 그래서 여성들은 분열적인 위치에 놓인다. 부역하면서도 저항해야 하는 것이다. 가부장제는 일부 남성들을 위한 체제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규범을 임의적으로 만든다.
최소한 이 영화에서 남성들은 하는 일이 없거나 민폐다. 한국적 가부장제 사회는 식민, 전쟁, 분단으로 이어지는 이산가족과 민간인 학살로 원가족이 부재한 경우가 많다. 승필의 부모님은 한국전쟁 때 한날한시에 죽임을 당한다. 무덤은 시신이 없는 허묘(虛墓)다. 그럼에도 승필은 손자인 성진을 데리고 수시로 부모님 산소를 오르내린다. 이동진 평론가의 지적대로, 뿌리가 없기에 더욱 뿌리에 집착하고 뿌리를 만들려는 형식적인 가부장제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처럼 영화 속에서 세 명의 장손은 집안일도, 바깥일도 하지 않는다. 승필은 연로하였고 약간의 치매 증상을 보이며 두부 공장 직원들은 그가 공장에 오는 것을 싫어한다. 태근이 등장하는 장면의 내용은 거의 술주정과 화투, 말싸움, 소리 지르기다. 조부모의 지극한 사랑을 받은 3대 장손 성진은 제례와 상례에만 등장하며 가족에게 별 관심이 없다.
가족과 두부의 공통점
이들 세 남성은 돈 버는 노동을 하지 않으면서도 장손이라는 무게 혹은 의무, 권리만 있다. 이러한 상황을 일부(?) 남성들은 “남자도 (무게와 기대 때문에) 힘들다”고 말한다.
<장손>은 한국 사회에서 보기 드문 남성성을 성찰하는 영화라는 점에서 이후 훌륭한 레퍼런스가 될 만하다. 감독도 그것을 의식했는지(?) <장손>이라는 영화 제목이 ‘촌스러운’ 것 같았지만 오래갈 제목인 것 같아서 그렇게 정했다고 한다. 가족 비판이라는 점에서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과 비견할 만하다.
감독은 남성으로서 자신이 받은 사랑과 기대 속에서도, 그 체제와 거리는 두고자 한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비판할 때 그 방식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그것은 애증과 같은 복잡한 감정이요, 내 안의 가부장제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그래서 <장손>은 세 남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판단을 기다릴 뿐 어떤 주장도 하지 않는다. 급진적인 영화지만 관객들은 편안하게 볼 수 있다.
가족과 두부의 공통점이 있다. 만들기 힘들며, 잘 부서지고, 잘 상하고, 또 상했을 때는 냄새가 고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