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무더위가 순식간에 물러나고 어느덧 ‘완연한’ 가을이다. 원래 ‘완연(宛然)’은 지금 실재하지 않는 대상이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또렷이 떠오를 때 쓰는 말이었다. 사라져버린 옛날 모습 그대로라든가, 존경하는 어떤 이의 풍모와 매우 비슷하다거나, 꿈에 그리던 신선세계가 펼쳐진 듯할 때, 그런 실감 나는 상상을 두고 완연하다고 표현했다. ‘눈에 보이는 것처럼 아주 뚜렷하다’는 사전적 풀이도 그런 전통을 반영한다. 하지만 요즘은 실제로 눈앞에 나타난 증세나 분위기가 뚜렷한 것을 의미하는 말로 더 많이 사용되는 듯하다. 그렇다. ‘완연한 가을’은 상상이 아니라 우리의 눈과 피부에 실제로 왔다.
가을은 풍성한 결실의 계절인 동시에 매서운 죽음의 계절이다. 생장을 주관하는 양의 계절이 지나고 숙살(肅殺)을 주관하는 음이 시작되는 때다. 다시 생명의 씨앗을 준비하기 위해 자신을 떨구고 썩히는 쇠락의 시간이 필요하다. 버리지 않고는 채울 수 없는 자연의 이치다. 초목은 아무 감정도 없이 그 냉혹한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사람만이 어떻게든 물러나지 않으려 버티느라 온갖 근심에 휩싸일 뿐이다. 가을은 온갖 나무가 앙상한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선악의 분별을 숨길 수 없게 되는 때이기도 하다. 온화한 관용이 참으로 소중하지만, 때가 이르면 엄정하고 살벌한 심판도 필요한 법이다. 추분이 지나야 사형 집행을 허가했던 전근대의 관습은 자연의 흐름에서 숙살의 기운을 받고자 함이었다.
상식이 무너져내리는 시대다. 무더위와 폭우의 9월 날씨가 그랬고, 천정부지의 농산물 가격도 그렇다. 최소한의 공정마저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되는 일이 반복되다가 끝내 부끄러움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뒤죽박죽이 된 정치판이 더욱 그렇다. 화려한 꽃과 풍성한 잎들로 싸여 있을 때는 잘 보이지 않던 온갖 치부들이 그야말로 ‘완연하게’ 드러나고 있다.
자연의 가을은 숙살을 겪고 소생으로 이어지는데 인간의 가을, 우리 정치의 가을에도 과연 온전한 숙살과 소생이 가능할지, 걱정스럽기만 하다. 많은 이들의 바람 속에 ‘완연하게’ 떠오르는 상식적인 공정함이란 여전히 아득하기만 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