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는 한 자다. 품사 하나에 얽매이지 않고 독립군처럼 행동하면서 여러 뜻을 거느린다. 한 한자에 하나를 더하면 보통의 단어가 되고, 하나만 더 추가하면 본인의 이름처럼 세 글자가 된다. 여기에 하나를 보태면 사자성어, 다시 하나를 붙이면 오언율시, 둘을 얹으면 칠언절구의 그윽한 한시의 세계다. 여기에 몇 글자와 더 어울리면 동양 고전의 심오한 문장들. 이렇게 산술적으로 더해나가면 쉽게 넘는 계단이 될까. 과연 그럴까.
초등학생 시절, 자유교양경시대회라고 하는 고전읽기에서 처음 <논어 이야기>를 접했다. 이때 읽은 깜냥을 논어의 전부로 생각한 게 병통이었다. 그러다가 불혹의 나이도 지나 문득 범 앞의 하룻강아지인 줄을 깨닫고 <논어>를 찬찬히 읽었다. 당시 부모님을 막 여읜 때이기도 해서 여러 글귀에서 많은 위로와 뒤늦은 후회를 함께 받았다.
빈 깡통은 언제나 요란한 법이다. 이런저런 느낌을 경박하게 떠들던 자리. 불문학에 정통한 번역가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 실은 동양 고전이 궁금해 더러 들여다보는데, 그 이야기들 그냥 다 알 만한 게 아닌가요, 너무 하나마나한 문장들이라서 누구나 쉽게 입에 올리는 입술의 얼룩 같은 게 아닐까요. 그만 말문이 탁 막혔다. 실은 나도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의 같은 생각을 가졌던 바이기도 했다. 무언가 뾰족하고 날카로운 난공불락의 인간 정신이 아니라 길가에 뒹구는 돌멩이처럼 너무나 평범하고 두루뭉실한 말씀들.
이렇다 할 식견이 없던 나는 애매한 대꾸를 겨우 짧게 던질 수밖에 없었다. 가령, 부부 사이에 구별이 있다는 ‘부부유별’도 참 당연한 말이지만, 정색하고 이 네 글자를 뜯어보면 여러 권의 책으론 모자라지 않을까요.
영화 <추락의 해부>를 봤다.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이 영화에 내가 더하고 뺄 말은 없다. 그냥 범박하게 말하자면 ‘부부란 무엇인가’에 대한 일면을 보여준 영화였다. ‘부부(夫婦). 명사, 남편과 아내를 아울러 이르는 말.’ 부도탑처럼 나란한 둘을 골똘히 보면, 똑같은 글자 사이 은하수가 흐른다. 대체 둘은 무슨 관계여야 하는가. 그 거리는 어느 정도여야 하더냐. 어떤 뜻으로 번역해야 하는 낱말이더냐. 영화를 보는 내내 ‘입술의 얼룩’이란 말이 자막처럼 떠돌아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