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혁명을 ‘난동’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있다
민주주의를 향한 노력을 깎아내리는 시선은 독립정신을 왜곡하려는 시도와도 맞물려 있다
왜곡의 시선은 종북·친북의 잣대로 독립운동가들의 선택을 함부로 갈라치기한다
사실보다 가치를 내세워 독립운동사=건국과정사 왜곡된 계보화로 이어진다
또 반공친일파의 삶을 공과율로 봐야 한다는 주장으로도 이어진다
이것이 2024년 현재 보수우익화한뉴라이트의 일부이다
지난 8월 신임 독립기념관장을 임명하는 과정에서 ‘뉴라이트’ 논란이 또 일어났지만, 당사자는 자신이 뉴라이트가 아니라고 답변했다. 이때의 논란을 계기로 윤석열 정부 들어 이미 임명된 몇몇 인사도 새삼 주목받았다. 하지만 그들도 하나같이 자신은 뉴라이트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비판자나 질문자나 자신의 뉴라이트관을 말한 적은 없다.
그래서 ‘뉴라이트가 뭐지’라고 묻는 사람이 생겨났다. 하지만 누구도 딱히 이렇다고 명쾌하게 정의한 사람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004년부터 오늘날까지 뉴라이트의 형성, 소멸, 변질 양상을 몇 줄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 논란 과정에서 확인된 분명한 사실 한 가지가 있다. ‘좌파’에게 빨갱이란 딱지가 붙는 순간 작동하는 낙인효과처럼, ‘우파’에게는 뉴라이트란 말이 그럴 만한 상징어가 되었다는 점이다.
1. 뉴라이트 = 개혁 보수의 형성
한국에서 특정 집단을 가리키는 뉴라이트란 말은 2004년 11월7일자 동아일보 기사부터 나온다. 동아일보는 ‘뉴 라이트, 침묵에서 행동으로’라는 기획 연재부터 ‘뉴 라이트, 분열에서 통합으로’라는 기획까지 여러 차례 보도했다. 신문은 한국 ‘사회 곳곳에 꿈틀거리고 있는 뉴 라이트(New Right)의 움직임’을 사람, 단체, 영역별로 소개하며 그룹화를 시도하고, 그들의 이념 좌표와 분야별 과제를 보도했다. 동아일보가 밝힌 뉴라이트의 핵심 가치는 첫 기획 기사의 제목인 “‘자유-시장’ 지킬 새 그룹 뜬다”에서 알 수 있듯이 자유와 시장이다.
보도 직후인 11월 하순에 두 단체가 결성되었다. 전향한 운동권 출신자들이 주도한 ‘자유주의연대’와 ‘온건한 복음주의 사회운동’ 세력이 결집한 ‘기독교사회책임’이다. 자유주의연대는 이후 검정교과서를 공격하며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고 종북몰이를 하던 ‘교과서포럼’, 전향한 주사파를 중심으로 북한의 인권과 민주화를 제기한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등과 연대하며 2005년 10월 ‘뉴라이트네트워크’를 결성했다. 한 달 뒤인 11월엔 기독교사회책임의 일부 회원이 나서서 ‘뉴라이트전국연합’을 결성했다.
느슨한 연대의 뉴라이트네트워크는 작은 정부와 큰 시장을 구현하는 시장친화형 경제시스템과 신자유주의를 표방했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친북좌파담론을 끊임없이 생산하며 반북·반공 이념 공세에 적극적이었다. 심지어 네트워크에는 의사 조직도 참가했고 다양한 전문 분야의 교수 모임도 있었다. 또한 뉴라이트전국연합은 지역과 부문 조직에 많을 때는 17만명의 회원을 둘 만큼 전국 조직이었다.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를 공개 지지하며 정치색을 공공연하게 드러냈고, 담론 중심의 뉴라이트 운동에 활동성을 부여한 단체였다. 그렇다고 서로 역할을 분담한 것은 아니었다.
다양한 그룹들이 짧은 시간에 개별 차원을 넘어 매우 빠르게 세력화할 수 있었던 데는 조선일보 등 보수 언론의 전폭적인 지원이 컸다. 이들 언론은 ‘편애’한다는 비판을 들으면서까지 빈번하고 주목도 높은 우호 기사를 많이 썼다. 언론이 그럴 수 있었던 데는 진취적이고 개방적으로 비친 뉴라이트의 초기 이미지와 관계가 깊다. 그들은 올드라이트와 별개로 ‘보수의 혁명’을 꾀하는 혁신우파를 표방했다.
더구나 보수우파는 진보 진영에 연이어 정권을 내준 데다, 2004년 총선도 패배하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도 실패했다. 살아 돌아온 노무현은 8·15 경축사에서 과거사 청산작업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보수우파로서는 위기의식을 더더욱 강하게 느꼈고, 뉴라이트는 그 시점에 등장한 움직임이었다. 여기에는 보수우파만의 자신감도 깔려 있었다. 그들은 2003년과 2004년 ‘반핵반김(反核反金) 자유통일 3·1절 국민대회’ 때 10만명을 참여시킨 경험이 있었다. 반노무현 반좌파 동원력을 확인한 것이다.
2. 뉴라이트, 자멸하거나 극우와 손잡거나
뉴라이트 내부에는 매우 다양한 요소가 공존했으므로 그들을 하나로 특정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그들은 한동안 같은 방향으로 행동했다. 2007년 대통령 선거 때 그랬다. 올드라이트와도 함께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막상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뉴라이트의 존재감은 급속히 소멸했다. 많은 뉴라이트 인사가 정부와 국회에 참여했다. 이젠 노무현 정부를 비판하는 것만으로도 존재감을 드러내던 때와 달라야 했다. 집권 세력에의 참가는 개혁 보수로서 행동하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가치를 옹호’하는 모습을 보여줄 기회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못했다. 오히려 이명박 정부가 인천국제공항 같은 국가기간산업만이 아니라 수도, 전기, 의료 등 관련 공기업 305개를 선진화라는 이름으로 민영화할 계획을 수립하자 동참했다. 시장에 맡긴다며 서민의 삶과 공공성을 훼손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던 것이다.
뉴라이트 인사들은 1948년 건국절론, 자유민주주의 용어 사용 문제, 시장경제와 민영화 및 감세 문제, 북한 인권운동에 대해 이념적 근거를 제공했다. 정치적 중립을 포기하고 역사교과서에 대해 이념공세를 펼치고 역사교육 과정의 개발에 관여했다. 그들은 이명박 정부 내내 이념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좌파’로 몰아 척결의 대상으로 간주했다. 자유를 말하면서도 양심과 비판의 자유를 용납하지 않고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훼손했다. 진중권 당시 중앙대 겸임교수 해임 사건이 단적인 보기일 것이다. 결국 그들은 ‘합리적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범(汎)보수-중도 그룹’을 표방하는 데 그쳤다. 대신에 이념 갈등을 벌이며 이익집단화한 권력자의 모습만 노출했다. 올드라이트와의 차별성도 드러내지 못했다. 거기에다 부패 사건까지 저질렀다.
결국 처음부터 적극 후원했던 동아일보조차 이명박 정부가 끝나기도 전에 손절했다. 뉴라이트에 신보수주의라는 말을 쓰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보다 앞서, 싱크탱크를 자처하던 뉴라이트재단도 ‘(사)시대정신’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전국의 뉴라이트 세력을 움직이던 뉴라이트전국연합은 이명박 정부가 시작될 때부터 사실상 유명무실했으니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때부터 뉴라이트라는 말이 들어간 조직체를 찾기가 어려워졌다. 과거 회귀와 권위주의를 내장한 올드라이트와 구별되는 혁신우파의 가치도 사라졌다. 개혁과 진취로 자신을 포장하고, 노무현 정부의 실정을 틈타 영향력을 확대하더니, 막상 비판의 대상이 없어지자 자멸하거나 보수우익화하며 생존했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변질한 뉴라이트의 적나라한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 역사교과서와 역사교육 문제로 두 차례나 크게 요동쳤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는 전쟁에 임하는 자세로 교과서를 바로잡아 5년 내에 좌파를 척결하겠다는 정책 목표를 설정했다. 교과서는 이 전쟁을 위한 수단이었다. 처음 박근혜 정부는 2013년도 검정을 통과한 교학사판 교과서로 시장에 도전했다. 하지만 친일·독재를 미화하고 극우반공적인 주장까지 과감하게 펼치는 교과서라는 비판을 받은 데다 1000건이 넘는 오류가 발견되면서 시민사회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0%의 채택률로 참패했다. 그러자 박근혜 정부는 곧바로 좌파 세력이 학생들에게 부정적인 역사관을 심어주지 못하도록 하나의 교과서로 가르쳐 국론 분열을 막아야 한다며,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시도했다. 이는 다양성을 분열로 간주하고 반공 논리로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유신독재 때의 반공권위주의를 그대로 복제한 주장인 데다, 오랜 희생 과정에서 쟁취한 민주화의 의미를 부정하는 논리다. 그러니 정부의 국정화 강행에 대해 보수 신문조차 학생의 다양한 시각과 사고에 도움이 되는 교과서가 나오도록 검정체제의 실효성을 높이는 쪽을 권유할 정도였다. 개발된 국정교과서는 촛불혁명으로 세상 밖에 나오지 못했다.
촛불혁명을 ‘촛불난동’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상적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의 줄기찬 노력을 깎아내리고 부정하는 시선은 독립정신을 왜곡하려는 시도와도 맞물려 있다. 왜곡의 시선은 종북·친북의 잣대로 독립운동가들의 선택을 함부로 갈라치기한다. 또 1919년 건국절과 1948년 건국절 주장의 갈등을 조정한다며 사실보다 가치를 내세워 독립운동사=건국 과정사의 왜곡된 계보화로 이어진다. 그러면서 ‘1948년 건국일’이 맞다고 하거나, 2006년 결성된 한반도선진화재단처럼 2024년이 “망국 114주년과 해방 79주년 그리고 광복과 건국 76주년을 맞은 해”라고 본다. 교묘한 위장술이다. 가면의 술책은 안익태, 백선엽처럼 1945년 전과 후를 살아간 반공친일파의 삶을 공과율(功過率)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으로도 이어진다. 굳이 식민지 지배를 긍정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친일파 복원이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2024년 현재 보수우익화한, 자유와 개혁을 말하지만 자유도 존중하지 않고 개혁도 상실한, 뉴라이트의 일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