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씨 왕후가 돌아갔다. 임종 때 유언하기를, “내 행실에 실수가 있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국양왕(고국천왕)을 보겠는가? 만일 신하들이 차마 나를 구렁텅이에 버리지 못하겠거든 산상왕 곁에 묻어주시오.”
고구려 9대 고국천왕과 10대 산상왕의 아내로 살았던 왕후 우씨. 그는 시동생인 산상왕과의 관계를 후회하면서도 남편이 아닌 시동생 곁에 묻히고자 했다. 고국천왕은 죽어서도 우씨의 행실에 화가 동했는지, 무당의 꿈속에 나타나 울분을 토했다. “어제 우씨가 산상왕에게 가는 것을 보고 내가 분을 참지 못하여 그와 싸웠소. 물러나 생각하니 낯이 두꺼워도 차마 나라 사람들을 볼 수 없소. 자네가 조정에 알려 무슨 물건으로 나를 가리게 하오. 그러자 사람들은 능 앞에 소나무 일곱 겹을 심었다.”(<삼국사기> 권 17, ‘고구려 본기’ 제5 동천왕 8년 조)
무당을 통해 고국천왕의 진심이 전해진 것인지, 후대 사람들의 생각이 덧칠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럴듯한 이야기다. 지금은 우씨 왕후를 자신의 삶을 개척한 진취적 인물로도 평가하지만, 과거에는 품행이 방정치 못하고 권력에 눈먼 여인으로 평가했다.
백성이 굶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며 빈민 구제책인 진대법을 실시했던 고국천왕. 1800여년 전 백성들을 긍휼히 여겨 사회복지 정책을 폈던 성군일지라도 왕후의 부도덕한 행실에 아량을 베풀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 꼴 저 꼴 보기 싫었던 그는 세상을 떠난 후에도 무당에 강림해 자기 무덤 주위를 가릴 늘 푸른 휘장을 부탁했다. 이에 사람들은 무덤 앞에 소나무를 심어 그의 영혼을 조금이나마 위로했다.
한편, 고대에는 나무를 신성시해 영생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현세와 내세가 이어져 있다는 계세적(繼世的) 세계관을 지닌 고구려인들은 무덤 주변에 소나무를 심었고, 나무를 종종 고분벽화의 중심 주제로 표현했다. 집안 각저총 벽화에 등장하는 나무나 진파리 1호분 벽화에 그려진 소나무도 그런 사례다. 고국천왕 무덤 주변에 소나무를 심은 내력은 씁쓸하고 안타까운 역사이지만, 재식사(栽植史)에는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삼국사기>에 적힌 위 내용은 우리나라 차폐식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지하에서도 백성들에게 면구스러워했던 고국천왕. 그는 후대 사람들이 자신보다 왕후에게 더 많은 관심을 보일 줄 알았을까. 그가 묻힌 고국천원에 소나무가 지금도 무성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