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용기에 국회는 응답하라

임아영 젠더데스크

5·18 때 성폭력 피해자들
44년 지나 국회서 증언대회

여전히 묻혀있는 과거의 고통
이제는 정치와 사회가 답해야

“1980년 5월 저는 열아홉 살이었습니다. 당시 제가 보았던 사실과 제 마음속에 진실로 꺼내고 싶지 않은 저의 과거를 증언하겠습니다.”

44년이 걸렸다. 10대 소녀가 환갑이 넘은 나이가 된 시간이다. 지난달 30일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5·18 성폭력 피해자 증언대회’에서 5·18 성폭력 피해자 자조모임 ‘열매’의 대표인 김복희씨는 ‘사실’과 ‘진실’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그의 ‘피해 사실’은 다음과 같다. 김씨는 그해 5월22일 연인의 죽음을 목격한 뒤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구 전남도청에 갔다가 27일 새벽 연행됐다. 수사관들은 그의 옷과 속옷을 벗긴 채로 조사하며 뺨을 때렸다.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화장실에 갔는데, 경비를 서던 군인이 따라 들어오더니 입을 막고 강간했다.

‘마지막 사실’을 드러내는 데는 40년이 넘게 걸렸다. ‘진실’로 꺼내고 싶지 않은 과거였기 때문이다. 5·18을, 광주를, 민주화운동에의 투쟁을 발판 삼아 정치를 한 사람들의 이름을 여럿 떠올릴 수 있는 2020년대가 되었지만 그의 피해는 ‘꺼내고 싶지 않은 과거’였고 ‘사람들이 원치 않는 진실’이었을지 모른다. 이들이 증언하지 않으려 한 것은 아니었다. 1989년 국회에서 열린 5·18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 청문회에서 전옥주씨가 성고문 피해를 증언한 뒤 또 다른 피해자가 강간 피해를 증언하려 했지만, 야당 국회의원들의 만류로 무산됐다. ‘쟁점 사안이 아니다’ ‘너무 끔찍해서 국민들이 믿어줄 것 같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과거사 성폭력 피해는 여전히 수면 아래 있다. 지난해 말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는 16건의 성폭력 피해에 대해 ‘진상규명’ 결정을 내리고 국가의 책임을 인정했지만 실제 조사 대상은 52건이었다. 전부 진실을 규명하지 못한 이유는 피해자가 사망했거나 피해가 심할수록 피해자나 가족이 진술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는 새 1989년 증언하지 못한 피해자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투병 중이다. 최근 딸들이 엄마가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후세대로 5·18 성폭력 피해의 트라우마가 이어지고 있다. 첫째 딸은 열매 모임에 편지를 보내 이렇게 전했다. “올해 저도 아이를 임신하고 엄마의 5·18 성폭행 피해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희망과 미래가 없어 삶을 포기하고 싶었다는 엄마의 증언을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했던, 왜 그러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던 엄마의 아픔이 5·18 당시 성폭력 피해 때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안 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 사회는 엄마의 피해를 왜 이렇게 오랫동안 수면 아래 감췄는지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도 딸은 열매 모임에 전했다. “힘들고 어두운 긴 터널을 견뎌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다. 이들은 견뎌서 이겨낸 사람들이다. 피해자였지만 증언자가 되었고 서로 피해의 목격자가 되어주었다. 자신들의 피해를 받아들이길 거부했던 국회에 나가서 기어코 증언했다.

이제 우리가 응답할 차례다. 조사위는 6월 활동 종료를 앞두고 피해자 치유와 명예 회복을 위한 권고사항을 명시한 종합보고서를 대통령실에 전달했다. 하지만 정부는 지난 3개월간 피해자에게 진상규명 결정 통지서를 보낸 것 외에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다행인 건 국회 증언대회를 주최한 국회의원들의 명단이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비롯해 민형배·박균택·안도걸·양부남·전진숙·정준호·정진욱·조인철 등 광주 지역구 의원 8명 등 범야권 의원 30명이다. 이날 추 의원은 “진상규명과 함께 제대로 된 배·보상을 위해 국회가 제 할 일을 하겠다. 오늘 증언대회는 이를 약속하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최경숙씨가 증언대회에 나서기 전 아들에게 ‘그거 한다고 보상금 얼마나 더 주겠냐’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자 김선옥씨가 말했다. “돈을 얼마를 줘도 우리 인생은 보상받을 수 없다.”

배상과 보상은 중요한 일이지만 그들의 세월은 어떻게 해도 되돌릴 수 없다. 김선옥씨가 원하는 건 “홀로 힘들여 키운 딸에게 ‘성폭력은 당했지만 끝내 지지 않았다’는 말을 부끄럽지 않게 하는 사회”다.

국회 증언 후 3일이 지났다. 피해자에게 증언이란 자신의 트라우마를 다시 되새기는 작업이다. 아마 국회에서 얼굴과 이름을 공개하는 큰 결단을 한 그들은 오늘 또 아플 것이다. 아프지만 지지 않고 여기까지 온 그들에게 정치가, 그리고 사회가 답해야 한다. 이 답이 세심하게 제시될 때, 김선옥씨가 딸에게 보여주고 싶은 사회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임아영 젠더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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