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기후위기, 난민과 환경파괴, 탈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유산 등은 비엔날레들의 단골 주제다. 여성과 소수자,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인종, 이주, 인권, 노동, 생태 등도 빈번하게 등장한다.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베니스비엔날레는 물론이고 한국의 광주비엔날레도 마찬가지다. 주최 도시와 전시의 규모는 제각각이지만 내용 면에선 오십보백보다.
그 이유는 오늘날의 사회가 직면한 글로벌 위기와 도전 과제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문제이자 변함없이 논의해야 할 화두라는 것이다. 그러나 비엔날레 간 차별성이 없다는 비판도 감내해야 한다.
주제 재탕은 논란을 유발하지 않는 가장 안전한 전략이기도 하다. 보편적 거대담론을 택하면 다툼·이견이 줄어든다. 베니스비엔날레 같은 권위 있는 행사의 패러다임을 추종하거나 동시대 예술계 흐름에 부응하는 것만으로도 사회적 의사를 주도하는 듯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 다만 비엔날레이기에 가능한 ‘새로운 역동적 파괴 모델’로서의 위치를 망각한다는 지적은 불가피하다.
주제만 흡사한 게 아니다. 구조와 형식은 서구중심주의의 편향성을 따르고, 전시 구성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잡종적이거나 혼성적이다. 올해 광주비엔날레처럼 30여개의 파빌리온(국가관)을 만들며 주제와 무관한 양적 확장에 골몰하는 것도 공통점이다.
특히 한국의 비엔날레들은 유독 ‘살아 있는 권력’을 소환하지 않는다. 비엔날레라면 정권을 잡고 있거나 실권을 쥔 세력을 쟁의의 장으로 불러내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시각예술을 통해 건강한 미래 가치를 제시해야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나마 외국은 좀 낫다. 카셀도큐멘타를 포함한 베니스비엔날레 등 유수의 외국 시각예술 행사에선 살아 있는 권력과 그 역학을 탐구한 작가와 작품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아이 웨이웨이, 한스 하케, 타링 파디 등 예술가들은 자크 데리다를 비롯한 랑시에르, 미셸 푸코 등 철학자와 사상가들의 이론을 바탕으로 정치와 자본주의, 예술과 이념 사이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자국 정치권력 문제에 적극 개입한다. 그리고 비엔날레는 그걸 수용한다. ‘지금 여기’를 다루는 비엔날레의 현전성 측면에서 보면 극히 당연하다.
한국의 비엔날레는 다르다. 성역이 있다. 그렇다고 예술로 치환할 불화(不和)적 요소가 없는 것도 아니다. 정부의 노골적인 언론장악, 표현의 자유의 위축, 편향된 이데올로기로 인한 민주주의 퇴행, ‘현대판 밀정’들과 매국노들이 득세하는 현실 등, 당대의 한국과 직결되는 이슈들이 산재해 있고, 이는 모두 미적 표현의 대상일 수 있다. 대통령 부인의 주가조작 및 공천 개입 의혹에서부터 해병대 ‘채 상병 순직’ 사건, ‘이태원 참사’ 등에 이르기까지, 예술가의 시각에서 발화되어야 할 불합리·불가해·모순이 넘친다.
그러나 우리의 비엔날레들은 침묵한다. 굳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아도 모든 미술이 정치적이며 정치적 관행의 한 형태라는 식으로 넘기고 만다. 그런데 여기에도 사정이 있다. 한국의 비엔날레는 대부분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적 지원으로 이루어진다. 예술감독이든 작가든 눈치를 안 볼 수 없다. 발언보다 참여가 더 중요하다.
최근엔 대중성을 앞세운 ‘지방 축제’로 변질되면서 시대를 관통하는 격정적 ‘제안의 공간’이라는 비엔날레의 특성마저 잃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선 권력을 향해 진실을 말하는 용기, 즉 파르헤지아(Parrhesia)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대체 비엔날레는 왜 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