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김재윤 우리동물병원생명사회적 협동조합 대표원장

산책을 나온 건지, 냄새를 맡으러 나온 건지. 우리집 나비는 수렵견의 습성이 강해, 유독 ‘냄새 맡기’에 열심입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습니다. 함께 산책하는 입장에선 “대충 하고 갈 길 좀 가십시다” 하고 싶지만 후각능력을 사용하는 것은 개들의 본능적인 욕구 해소에 꼭 필요합니다. 사람과 함께 사는 탓에 후각을 무기 삼아 먹이를 사냥할 기회가 없으니, ‘냄새 맡기’만이라도 힘껏 도와줘야 합니다.

사람에게도 후각과 냄새는 소중합니다. 며칠 전, 혼자 부대찌개 앞에 앉았다가, 보고 싶은 사람을 떠올렸습니다.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향이 느껴’졌다는 노랫말에 비하면 분위기가 참 옹색합니다만, 라면 냄새, 햄·소시지 냄새가 얼굴에 덮치자, 함께 나눠 먹으며 키득거리던 마음씨 좋은 사람이 그립고, 소란했던 시절이 소환됐습니다. ‘프루스트 효과’라고 하는데, 과거에 맡아본 냄새를 매개로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는 현상을 말합니다. 시각이나 청각을 통해 얻은 감각정보와 달리, 후각정보는 대뇌 변연계로 이동하는데, 우리들 뇌에서 장기기억과 감정을 관장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냄새라는 정보가 변연계에 들어오면 기억이나 감정과 연결됩니다. 그렇게 연결된 냄새는 되돌아가고 싶은 시간과 보고 싶은 사람을 떠올리게 합니다.

개들의 후각은 사람에 비해 훨씬 뛰어납니다. 사람과 달리, 개들의 비갑개는 꼬불꼬불한 미로 모양인데, 이는 비강의 표면적을 넓혀 더 많은 후각수용체가 분포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 결과 사람의 후각수용체는 600만개, 개의 경우 최대 3억개의 후각수용체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좋은 코로 한 숨에 여러 번 냄새를 맡는 것도 가능합니다. 숨을 내쉬는 동안에도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덕분입니다.

우리는 오래된 기억과 그때의 감정을 추억이라 부릅니다. 냄새가 추억을 불러일으킨다면, 개들의 추억이란 우리의 그것보다 훨씬 화려하고 강렬한 색채이지 않을까요? 그래서 개들은 착한 동물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추억이 있어 착한 것이니까요. 우리는 누군가에게 그리운 사람으로 기억되기 위해 살아가는 거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옛 일터에서도 ‘구관이 명관이었다’ 소리가 들려오길 바라고, 헤어진 인연에게도 ‘참 좋은 사람이었다’고 기억되길 바라기에, 조금씩 더 좋은 사람이 되어갑니다.

가을이 되었고, 아침 문밖을 나서면 쨍한 내음이 훅 하고 끼쳐 옵니다. 나비는 한강변에 서서, 눈을 지그시 감고 천천히 숨을 쉽니다. 멀리서 오는 바람 냄새에 보고 싶은 누군가를 떠올리는 모양입니다. 나비의 시간은 빨리 흐르지만, 특출한 후각이 있으니, 추억은 저보다 많고 선명할 거라 믿고 싶습니다. 그 생애 동안 많이 사랑받아서, 보고 싶은 사람도 많이 생겼으면 합니다. 문득 제가 나비 걱정할 주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을까요? 어떤 냄새에 저를 떠올릴까요? 사람들의 후각이 개들만큼 좋지 못해, 그들의 추억 또한 흐릿할 거라 기대하는 저입니다. 하지만 언젠간 가을 아침 바람 냄새, 코스모스에 떨어지는 햇볕 냄새처럼 근사한 향기에 문득 생각나는 사람,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그리운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김재윤 우리동물병원생명사회적 협동조합 대표원장

김재윤 우리동물병원생명사회적 협동조합 대표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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