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보금자리 찾기

오은 시인

며칠 지역 출장을 다녀왔더니 온몸이 찌뿌듯하다. 씻고 침대에 걸터앉으니, 여기가 내 누울 자리구나 싶다. 침대 옆에 놓인 읽다 만 책을 편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흘 전으로 자분자분 돌아갈 시간이다. 읽고 있던 책은 오수영이 쓴 <사랑하는 일로 살아가는 일>(고어라운드, 2024)이다. 둘 다 우리가 매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누군가 “제대로?”라고 물으면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 어려운 일이다. 사랑하는 일의 온도와 살아가는 일의 채도는 사람마다 다르고, 뜻대로 사랑하고 잘 살아가고 싶은 계획은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책을 읽다가 다음 대목을 여러 번 읽었다. “여러분은 삶이 힘들 때 가장 먼저 혹은 가장 마지막으로 누구를 찾아가시나요. 맞아요. 그래서 저도 일단 본가인 대전으로 갑니다.” 승무원 생활과 작가 생활을 병행하던 도중, 그는 버거움을 느끼고 잠시 멈춤을 선택한다. 몸에 맞는 옷과 마음에 걸맞은 상태를 찾기 위해, 상황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당당히 맞설 용기를 되찾기 위해. 찾고 되찾는 일을 위해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누울 자리다. 누워 편하게 발 뻗을 수 있는 보금자리. 그 자리에서 회복하고 일어난 나는 이전 나와는 다를 것이다.

보금자리는 “새가 알을 낳거나 깃들이는 곳”을 뜻한다. ‘길들이는 곳’이 아니라 ‘깃들이는 곳’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깃들인다는 것은 그 안에 들어 살기 위해 자리 잡는 과정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깃들임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길들임이 가능해질 것임은 자명하다. 보금자리는 또한 비유적으로 “지내기에 매우 포근하고 아늑한 곳”을 가리킨다. 오수영 작가처럼 본가를 보금자리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비좁고 불편하더라도 자신이 현재 머무는 집에서 안락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매일 들르는 카페나 머리를 식히기 위해 찾는 공원을 보금자리로 삼을 수도 있겠다. 불확실함이 가득한 사회에서 확실함을 선사하는 곳이 보금자리다.

보금자리가 꼭 하나만 있을 이유는 없다. 그것이 꼭 나의 소유일 필요도 없다. 어쩌면 삶이란 곳곳에 숨어 있는 보금자리를 찾아다니는 여정일지 모른다. 직장에 다닐 적, 내 보금자리는 회사 옥상이었다. 힘들 때면 탁 트인 곳에서 위를 올려다보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일을 반복했다. 멀찌감치 서서 무표정하게 걸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상하게 위안이 되었다. 그들과 내가 나눠 가진 것은 명쾌한 답이 아니었다. 흐리터분한 질문이었다. 옥상 계단을 내려갈 때면 이상하게 다시 직장에 깃들 힘이 생겼다. 단골 카페의 구석진 자리도 또 하나의 보금자리였다. 그곳에서는 다만 가만히 존재할 수 있었다. 내가 나임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얼마나 홀가분한지 절절히 깨달았다.

보금자리와 새를 떠올린 덕분일까. 돌아오는 길에는 “삶은 달걀 같다”라는 표현을 곱씹었다. 마침 사흘 전 강연 때 비유에 관해 이야기하며 들었던 예시다. “왜 그럴까요?”라고 물으니 갖가지 답변이 흘러나왔다. 사랑하는 일의 온도와 살아가는 일의 채도가 다른 것처럼, 사람들에게 달걀은 다 다른 알인 모양이다. “겉과 속이 달라서요?” “언뜻 비슷하게 생겼지만, 자세히 보면 다 다르니까요?” 등의 답변을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깨지잖아요. 깨져야 태어나니까요. 나타나니까요. 다음 장면이 펼쳐지니까요.” 말하면서 알아차렸다. 깨지기 전까지는 달걀도 보금자리였다는 것을.

천변을 걷는다. 걷다가 벤치에 앉는다. 앉으면서 알아챈다. 나는 줄곧 이 벤치에만 앉아왔다는 것을, 이 벤치는 다른 것에 비해 생채기도 많고 낡았는데 버릇처럼 그렇게 해왔다는 것을. 이곳이 또 다른 내 보금자리였던 것이다. 벤치에서 일어서며 상상한다. 아직 가보지 않은 보금자리에 선선히 깃들고 길드는 나를. 포근하고 아늑하다.

오은 시인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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