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살들의 역사

손희정 문화평론가

“Never Again(다신 안 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무차별 폭력과 살상 행위를 묵인하는 논리다. 이는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을 기억하면서 다신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유대인의 생명과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일종의 ‘판단 원칙’으로서 작동해 왔다. 위르겐 하버마스 같은 세계적 철학자가 이를 옹호하기도 했거니와, 내 주변에서도 이에 심정적으로 동조한다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유대인 대학살이 또 다른 학살을 정당화할 정도로 인류 문명사에 있어 그토록 특별한 일일까?

얼마 전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된 ‘비판적섬이론학회’에 참가한 영국의 비판이론가 마크 데브니는 유대계 독일 철학자인 아도르노가 저지른 실수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아도르노는 근대적 기획인 ‘이성’이 어떻게 홀로코스트와 같은 야만을 초래하게 되었는가를 비판하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오디세우스를 서구 유럽의 계몽주의적 인간의 표상으로 해석했다. 호메로스가 오디세우스를 신화적인 존재인 세이렌의 유혹을 이겨내는 탈주술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의 형상으로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데브니는 이런 해석이야말로 유럽 중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하는 아도르노의 어리석은 실수였다고 지적한다. ‘오디세이’의 세계는 근대 유럽이 아니었다. 그곳은 남부 그리스, 북부 아프리카, 그리고 페르시아의 제국들이 존재하던 고대 세계였고, 무엇보다 오디세우스가 모험 과정에서 머무른 여러 섬에서 경험한 환대는 전혀 유럽적인 유산이 아니었다. 아도르노 자신도 ‘인종청소’를 가능하게 했던 유럽 중심적인 인식론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렇게 완전히 다른 세계를 유럽의 렌즈로 해석해 버렸던 셈이다. 데브니는 이에 더해 아도르노가 이 글을 캘리포니아에서 작성했음에 주목한다. 그 사실이 왜 중요할까? 그는 다음과 같이 이어간다. “캘리포니아는 1848년에 미국의 영토가 되었고, 그에 이르기까지 캘리포니아 선주민의 80%가 학살당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아도르노는 “홀로코스트 이후 서정시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예민한 철학자이자 미학자는 자신이 발 딛고 있던 바로 그 땅에서 일어난 대학살들에 대해서는 무지했거나 적어도 침묵했다.

데브니는 말한다. “홀로코스트의 전조”가 이미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이 저지른 다른 여러 학살 속에 존재했다”고. “마데이라, 카나리아 제도, 콜럼버스가 처음 정착한 곳 등 여러 지역에서 학살이 벌어졌다. (…) 운디드니, 브라질, 아르헨티나와 그 외의 아메리카 대륙에서, 인도네시아에서, 북극에서, 그리고 노예무역에서, 이 세계 도처에서 저질러진 학살들은 아우슈비츠의 끔찍함과 다르지 않았다. 홀로코스트의 끔찍함은 유일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학살의 역사가 지금 가자지구로 이어지고 있다.

유대인 홀로코스트는 잊어서는 안 되는 참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또 다른 학살을 정당화하고 또 다른 생명을 짓밟을 이유가 된다면, 그건 ‘어리석은 실수’가 아니라 ‘야만적인 기만’이다. 세계사는 ‘승자의 기록’이 아니라 이 세계의 수많은 학살들, 그 수많은 종말들의 기록이다. 그렇다면 지금 세계인의 ‘집단적인 기억’을 구성하는 ‘말들’이 누구의 이야기를 특권화하고 누구의 이야기를 누락시키는지 제대로 봐야 한다. 미국의 힘과 이스라엘의 돈이 묻어버린 가자의 진짜 이야기는 어디에 있는가?

‘Never Again’은 이제 신화가 되었다. 이스라엘의 폭주를 묵인함으로써 작동하는 국제 정치와 경제 논리를 가리고, 이 폭력에 어떤 윤리적 이유라도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이것이야말로 지금 우리를 현혹하는 주술이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손희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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