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류근은 잘생겼다. 잘생긴 주제에 심지어 동안이다. 뱃살도 없다. 뿐인가. 돈도 많다. 그런 주제에 시인답게 외로움을 탄다. 전화만 하면 외롭단다. 질투에 눈먼 나는 매번 냉정하게 쏘아붙인다.
“우리 치타(나의 사랑스러운 똥개)도 외로워. 꺼져!”
시인만 외로운 게 아니다. 나의 서울 친구들은 전화만 하면 하소연이다. 서울 것들은 늘 외롭고 뭔가가 부족하고 뭔가가 억울하다. 이상도 하지. 가진 것 없는 시골 할매들은 하소연을 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겪고 보릿고개를 지난 세대인데도 그렇다.
구례 한 할매는 1936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말을 걸자 할매는 아이고, 나 까짓거이 먼 할 말이 있가니요, 부끄럼을 타며 고개를 돌렸다. 슬며시 두유 한 팩에 빨대를 꽂아 건넸다. 다 마신 두유에서 뽁뽁 소리가 날 무렵 할매는 물었다.
“월매나 들을라요?”
고향살이 십여년, 나도 이제 눈치가 늘었다. 얼마나 들으려냐는 할매의 말은 그러니까 몇 시간 가지고는 택도 없다는, 각오 단단히 하지 않고는 들을 수 없다는 의미였다.
송곳 꽂을 땅 한 뼘 없었던 할매의 부모님은 일찌감치 일본으로 건너가 손톱 밑에 그러쥔 채 돈을 모았다. 운 좋게 귀국선에 몸을 실었고, 타국에서 모진 설움 받으며 모은 돈으로 논 몇 마지기를 샀다. 아버지는 자기 명의로 된 논을 사고 덩실덩실 춤을 췄다. 아버지가 막걸리 몇 잔에 취해 춤을 추던 날, 할매도 술지개미를 퍼먹고는 난생처음 취했다. 초가지붕 위에 걸린 것이 달이었는지 달처럼 둥근 박이었는지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다 땅으로 처박히던 것이 기억난다. 산도 달도 흥청흥청, 그게 아버지 운의 전부였다는 것을, 아버지도 할매도 알지 못했다. 이듬해 초여름, 첫 농사가 드물게 잘됐다. 부모님은 달빛을 밟고 새벽이슬을 밟으며 애지중지 논을 살폈다. 시퍼런 벼에 이삭이 달렸을 즈음, 온 식구가 설사를 했다. 울 힘조차 없어 뽁뽁 기어 화장실로 가던 길에 할매는 혼절을 했다. 눈을 떴을 때 할머니 할아버지도, 어머니 아버지도, 장가갈 날 받아놓고 입이 찢어져라 웃던 큰오빠도 언니들도 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동네 사람 절반을 죽인 이질을 이기고 할매는 살아남았다. 동네 사람들은 이질로 죽은 사람들을 들판에 겹겹이 쌓아놓고 불태웠다.
“멩절이라고 찾아갈 묏등도 없이 펭상을 살았소. 넘의 묏등만 봐도 눈물이 납디다. 사는 거이 하도 서러울 때는 넘의 묏등이라도 우리 어매 묏등맹키 끌어안고 울고 잪습디다.”
며칠 상관에 온 가족을 잃은 할매는 동생과 함께 작은집 더부살이를 시작했다. 할매는 마흔 즈음까지 손톱을 깎아본 적이 없다. 손톱이 닳아 뭉개지도록 작은집 일을 하며 살았다. 일꾼 하나 잃는 게 아까워 작은어매는 시집을 보내주지 않았다. 일곱 살 터울 남동생이 스물이 되었을 때 할매는 당차게 시집을 보내달라 청했다. 조카딸 등골 뽑아먹는다고 누구나 손가락질하는 것을 알았던 작은어매는 어쩔 수 없이 서둘러 하찮은 혼처를 물어왔다. 시집갈 날 받아두고 할매는 장롱을 뒤졌다. 아무리 찾아도 모본단이 보이지 않았다. 고명딸 시집갈 때 해 입힐 거라고 엄마가 애지중지 일본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진작에 작은어매가 팔아버린 것을 할매만 몰랐다. 새옷도 없이 신던 짚신을 신고 할매 혼자 섬진강을 건너 시댁으로 갔다. 가는 길에 짚신이 해져 맨발로 자갈길을 걸었다. 신발 한짝도 없이 시집온 년이라며 모진 구박을 받았다. 자식 넷 키우면서 할매는 안 해본 일이 없다. 지리산 나무를 훔쳐 숯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말끝에 할매는 배시시 웃었다.
“자석 너이 다 서울서 대학을 나왔단 말이요. 고것들이 워찌나 공부를 잘허는가 도둑질을 험시로도 신이 납디다.”
온 가족이 이질로 죽을 때 할매는 인생에 대한 모든 기대를 버렸다. 기대하지 않았으므로 닥쳐오는 모든 고통을 원망 없이 묵묵히 견뎠다. 견뎌낸 할매는 인생의 위대한 승리자다. 얼굴도 잘 보여주지 않는, 서울에서 대학 나온 잘난 자식 말고 자신처럼 살아남은 남동생과 이웃해 살며 할매는 오늘도 승리자의 기쁨을 만끽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