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밤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찾아온 것은 아침이었다
한 백 년쯤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내 몸이
커다란 항아리같이 깊어졌는데
혀와 입술을 기억해내고
나는 후회했다
알 것 같다
일어서면 다시 백 년쯤
볕 속을 걸어야 한다
거기 저녁 잎사귀
다른 빛으로 몸 뒤집는다 캄캄히
잠긴다
한강(1970~)
소설가 이전에 시인이었던, 그녀가 ‘심장을 문지르’며 쓴 언어의 창고로 들어간다. 그 창고에서 오래된 가구의 서랍을 하나둘씩 열어본다. 시인이 넣어둔 ‘저녁’을 맨 아래 서랍에서 꺼낸다. 그 어느 날 저녁의 “잎사귀”를 펼쳐본다. 잎사귀의 “푸르스름한 어둠” 속으로 작은 벌레의 시간, 별들의 시간이 흐른다. 잎사귀는 땅속으로 떨어져 죽고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한다. “한 백 년쯤” 시간이 흘렀을까. 시인은 “커다란 항아리같이” 깊어지다가, 이내 어두워진다.
깊어진다는 것은 더 어두워진다는 것. 그 순간에 시인은 “혀와 입술을 기억해내고”는 후회한다. 후회는 집을 잃고 헤맨다. 시인에게 혀는 녹거나, 비탈이었고, 입술은 캄캄한 동굴이었다. 무수한 말들을 가둔 입술. 그제야 “알 것 같다”고 고백한다. 세상은 거대한 잎사귀가 되어 매일 백 년이 지나간다. 극에 달한 어둠의 끝에서 반짝이는 “다른 빛”으로 “몸 뒤집”다가 다시 캄캄하게 잠기는 아침. 시인의 서랍 속에는 뜨거운 심장, 파란 돌, 달팽이, 눈송이, 웅덩이, 오래된 지옥, 무지개 그리고 다 쓰지 못한 저녁의 목록들로 가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