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도 없는데 귀마저 닫으면 어떡하나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권력은 매우 파워풀한 약물이다. 권력을 쥐면 사람의 뇌가 바뀐다.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지 않고, 실패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터널처럼 아주 좁은 시야를 갖게 하며, 자기애에 빠지게 하고, 오만하게 만든다. 권력은 모든 상황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지게 한다.”

아일랜드 신경심리학자 이언 로버트슨의 말이다.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지 곧이곧대로 믿을 건 아니다. 강조의 취지를 감안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면, 모든 권력자는 다 실패하고 다 비참한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다는 게 아닌가. 늘 예외는 있는 법이다.

권력을 쥔 적도 없고 쥘 뜻도 없는 보통사람일지라도 권력에 대해 나름의 평가는 할 수 있다. 적어도 권력의 부패나 타락 가능성을 보는 눈은 권력 내부 또는 근처에서 일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날카롭고 매섭다. 권력의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롭거니와 권력의 비위를 맞춰야 할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 윤석열은 어떤가? 그는 보통사람의 눈 밖에 난 지 오래다. 20%대의 지지율로 미루어 보건대 적어도 열에 일곱은 그의 국정운영에 비판적이다. 분노하는 사람도 많다. 무엇에 분노하는가? 정책은 논외로 하자. 진보 유권자가 분노하는 정책은 보수 유권자가 반기는 것이니, 그 어느 쪽이건 진영논리 독선은 자제하자.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모든 유권자가 똑같이 분노하는 게 있다. 무엇인가? 다음 여섯 언론인의 칼럼을 통해 그 분노의 대상과 이유에 대한 설명을 감상해보기로 하자.

(1) “보수층이 이재명의 온갖 범죄 혐의에 혀를 차다가도 ‘김 여사는?’이란 반박을 받으면 말문 막힐 때가 많다.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만든 지지자들로선 속된 말로 ‘X팔리는’ 심정이 된 것이다.”(조선일보 논설실장 박정훈, 9월21일)

(2) “주가조작, 공천 등에 영부인이 연루된 것만도 비정상인데 이를 덮으려 국가기관이 동원되고 거부권이 남용된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실, 검찰, 국민권익위, 여당은 영부인에게 복무하는 기관인가.”(한국일보 뉴스스탠다드실장 김희원, 10월1일)

(3) “대선 때부터 3년 넘게 보수진영 전체를 욕보이고 있는 여사 문제 수렁에서 헤어나려면 김 여사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일반 국민 누구나에게 적용될 절차를 거쳐 공정하고 엄정한 사법적 처분을 받는 것 이외엔 그 어떤 출구도 없다.”(동아일보 대기자 이기홍, 10월4일)

(4) “여권 핵심 인사는 ‘수석들이 있는 자리에서 김 여사가 대통령에게 민망한 언행을 하는 장면을 여러 번 목격했다’고 했다. 사실이라면 김 여사의 공천개입, 인사개입 개연성은 높아진다.”(중앙일보 대기자 이하경, 10월7일)

(5) “김건희의 ‘대통령 놀이’는 거침없다. 아니, 더 세졌다. 겁이 없기에,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주포들’을 대통령 취임식에 불렀을 게다. 공사 구분이 없기에, 대통령 전용기에 민간인 태우고, 디올백 선물을 챙겼을 게다. 과시욕이 남달라, 밤중에 요란한 마포대교 순시를 갔을 게다. (…) 나라도 정권도 ‘망조’ 들게 한 김건희의 대통령 놀이, 이제 끝낼 때가 됐다.”(경향신문 편집인 이기수, 10월9일)

(6) “나라가 김건희 블랙홀에 빠졌다. 자고 나면 추가되는 김 여사 관련 폭로·의혹에 여당 의원들은 ‘여론이 하루하루 달라진다’고 고통을 호소한다. 대통령 배우자가 국정 혼란의 진원지가 되고 있는 현 사태를 겪으며…”(한겨레 논설위원 황준범, 10월11일)

그렇다면 보통사람들이 느끼는 분노의 핵심 대상은 김건희인가? 아니다. 윤석열이다. 유권자들은 김건희가 아니라 윤석열에게 표를 주었다. 대통령의 의무와 책임엔 배우자가 국정운영을 망치는 걸 못하게끔 하는 게 포함돼 있다. 그러나 윤석열은 그 의무와 책임을 방기했을 뿐만 아니라, 김건희에 대한 내부 논의 자체를 원천봉쇄함으로써 사실상 김건희의 ‘대통령 놀이’를 찬양고무했다. 그에겐 부인의 ‘대통령 놀이’가 어떤 불법을 저지른다 해도 그걸 보호하는 게 국정운영보다 더 중요했다. 적어도 결과적으로는 그랬다. 보통사람들은 바로 이 점에 대해 가장 분노하는 것이다.

‘한동훈 “김건희, 자제 필요” 용산과 전면전 치닫나’라는 한겨레 10월10일자 1면 머리기사 제목이 기가 막히다. 한겨레가 기가 막힌 게 아니다. 이 제목은 현 정치적 상황의 문제를 제대로 포착했다. 여당 대표가 김건희의 자제를 요청하는 게 대통령·참모·친윤계 정치인들과의 전면전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게 기가 막힌다는 것이다.

친윤계 정치인들은 한동훈을 비난하느라 바쁘다. 아닌 게 아니라 왜 좀 더 일찍 김건희의 자제 필요성을 외치지 못했느냐고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감히 대통령도 어쩌지 못하는 절대 성역에 자제 운운하는 망발을 할 수 있느냐고 비난하는 것이다. 아니, 그들에게도 선의는 있을 게다. 정략에만 혈안이 된 야당에 대한 불신과 ‘탄핵 트라우마’ 때문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여태까지 그런 식으로 대응해왔기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다는 걸 인정할 뜻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이유는 단 하나. 아직 대통령 임기가 절반은 넘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그들이 임기 말, 임기 후에도 계속 지금과 같은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면 그 일관성에 경의를 표하겠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건 내 생각이 아니라 역사의 법칙이다.

윤석열은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대통령 권력이 악화시킨 점은 있겠지만,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올 4월에 번역·출간된 미국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의 <사람을 안다는 것>을 읽으면서 윤석열을 떠올린 적이 있다. 브룩스는 사람을 ‘디미니셔’와 ‘일루미네이터’ 두 종류로 나눈다. 디미니셔는 제 능력을 믿고 혼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만, 일루미네이터는 다른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면서 협력을 모색한다.

브룩스는 일루미네이터가 되는 것은 일종의 기량이고,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말한다.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 애를 써야만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이런 존재 방식을 “한국 사람은 ‘눈치’라고 부른다”며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기분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한국에선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하는 ‘눈치’를 이렇게까지 격상시켜준 게 반가웠다. 쥐꼬리만 한 권력이라도 갖게 되면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기분에 둔감하게 대응하는 걸 무슨 자랑이나 되는 것처럼 뻐기는 사람이 많은 세상에서 제발 위의 눈치만 보지 말고 아래, 그리고 수평적인 눈치 좀 보고 살자는 운동이라도 벌어지면 좋겠다.

윤석열은 검사 시절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았기에 권력의 탄압을 받기도 했지만, 사실상 그 덕분에 많은 사람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대통령이 된 후 그에게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는 게 밝혀졌다. 그가 나름의 원칙과 정의감 때문에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면, 대통령이 된 후에 자신의 슬로건이었던 ‘공정과 상식’을 스스로 유린하진 않았을 게다. 그는 민심의 눈치마저 볼 수 없는 ‘눈치 무능력자’였을 뿐이다! 대통령이 되는 데엔 ‘축복’이었던 특성이 대통령이 된 후에 ‘저주’로 바뀌었으니, 그 자신도 어리둥절할지도 모르겠다.

눈치가 없는 사람일지라도 눈치를 보는 삶을 살 수 있다. 귀를 열면 된다. 눈치가 있는 사람이 해주는 말을 들으면 된다.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윤석열에게 귀는 있지만 귀를 열 시간도 없고 뜻도 없다. 윤석열 대선 캠프 대변인을 지낸 이동훈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한 시간이면 혼자서 59분을 얘기합니다. 다른 사람 조언 듣지 않습니다. 원로들 말에도 ‘나를 가르치려 드냐’며 화부터 냅니다.”

눈치도 없고 귀마저 닫으면 어떻게 하잔 말일까? 김건희의 말은 잘 듣는다지만, 여태까지 그의 말을 너무 잘 들은 데다 맹종했기 때문에 지금 이 지경이 된 게 아닌가. 그 누구건 스스로 자멸할 권리는 있다지만, 공직 그것도 대통령이라는 엄청난 공직을 맡은 사람이 자멸의 권리를 주장하면 어쩌자는 건가. 인간 어리석음의 극치를 보여주겠다는 게 인생의 최종 목표인가? 그게 아니라면, 이제라도 자신에게 김건희 문제로 쓴소리를 했다는 이유로 내친 극소수의 사람들을 찾아 사과하고 그들의 고언에 귀를 열기 바란다.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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