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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훈의 민주주의 시간
정치의 정신
민주당은 중도 보수정당이다. 가치나 신념을 중시해 선거 패배를 감수할 수 있는 이념 정당이 아니다. 민주당은 다른 종류의 정당이다. 정당 이론가 앤서니 다운스식으로 표현하면, 정책 실현을 목적으로 선거에 승리하려는 정당이 아니라 선거 승리를 위해 정책을 선택하는 정당이다. 가난한 시민들의 삶을 보살피는 일을 다른 무엇보다 중시하는 진보정당과 달리 중산층 감세와 기업 활력, 경제성장을 우선시하겠다는 정당이다.민주당은 중도 보수·실용주의의원들의 행동 양식도 흥미롭다. 당의 승리를 위해 의원직을 희생할 의원은 없다. 당은 패배해도 나는 의원이 되어야 한다. 당이 아니라 내가 주목받아야 한다. 경쟁하는 개인 의원들이 있을 뿐, 보통의 정당에서 보듯 이념적 가치나 지향에 따른 계파들의 구성체가 아닌 정당이 민주당이다. 친명과 비명은 있지만, 어느 쪽이 진보이고 개혁이고 보수인지 알 수 없다. 세계 최대 규모의 거대 정당 안에 성장과 분배, 평화와 동맹, 평등과 자유, 생태와 개... -
한입 우리말
반려견과 개소리 사이에
눈뜨면 제일 먼저 강아지랑 산책을 한다. 털이 길어지면 강아지 미용실을 찾고, 추울 땐 따뜻한 옷을 입힌다. 자기 전에는 치카치카 깨끗하게 이를 닦아준다. 강아지와 지내는 삶이 일상이 되었다. 어제도 오늘도 ‘강아지 집사’의 삶을 살아간다. 이쯤 되면 키우는 게 아니다. 함께 생활한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싶다.‘개’라고도 하지 않는다. 작고 어린 것을 뜻하는 ‘아지’를 붙여 강아지라고 부른다. 그래야 말하기도 편하고 듣기에도 좋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개가 아니라 강아지다. 강아지를 좋아할수록 일상에서 개와 강아지의 구분은 모호해진다.이제 강아지는 단순히 키우는 동물에 머무르지 않는다. 정서적으로 감정을 나누는 가족처럼 여겨진다. 그렇다 보니 개보다 강아지란 말이 더욱 정겹게 다가온다. 같이 삶을 누리니 견주(개 주인)도 아니다. 강아지 보호자가 된다. 애완견이라고는 더더욱 하지 않는다. 짝이 되는 동무를 뜻하는 ‘반려’를 덧붙여 반려견이라 한다. 반려견은 개가 아... -
정동칼럼
한국 사회에 내전은 없다
최근 주변에서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을 비공개로 전환했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듣는다. 자신의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정치 집회나 유명 정치인과 찍은 사진이 게시돼 있다면 아예 지워버리기도 한다. 누군가가 나의 정치적 성향을 검열하고 공격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어떤 분은 평소처럼 단골 맛집에 들렀는데 사장님이 최근 극우 집회에서 연설한 유명 역사 강사의 유튜브를 큰 볼륨으로 듣고 있더란다. 그동안의 의리 때문에 그냥 나오지는 않았지만 앉아 있는 동안 심한 불편함을 겪어야 했다. 무심코 탑승한 택시에서 운전자가 극우 성향의 주장을 늘어놓자 무서워서 목적지에 닿기도 전에 내려버렸다는 체험담도 있다. 한 식당 사장님은 어느 날 윤석열을 규탄하는 몇몇 손님의 바로 옆 테이블에서 몇몇 청년이 윤석열의 석방을 축하하는 건배주를 하더란다. 저러다 싸움이라도 벌어지지나 않을까 조마조마했다고 털어놓는다.필자가 진행하는 유튜브 방송에서도 “화가 난다” “불안하다” “무섭다... -
세상 읽기
뉴라이트의 메타정치
지난 6일 독일 공영방송이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방영하려다 취소했다. <인사이드 코리아: 중국과 북한 그늘 아래의 국가 위기>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는 지난달 25일 방송사 홈페이지에 미리 공개된 바 있다. 계엄을 옹호하는 극우 유튜버의 주장을 과도하게 담고 있다. 한국의 국가 위기에 미국·중국·북한 간의 권력 투쟁이 반영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보수 언론의 여론조사를 근거로 윤석열 지지가 51%, 반대가 47%라고 알렸다. 외교부가 손 놓고 있는 사이 일방적 주장에 대한 교민과 시민단체의 항의가 잇따랐다. 결국 방영을 취소하고 홈페이지에 올린 다큐멘터리도 삭제했다. 우발적 에피소드로 보기엔 찜찜하다. 유럽을 포함해 전 세계가 뉴라이트 세력의 ‘초국적 연결망’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엄혹한 현실을 노출했기 때문이다.뉴라이트가 유럽에서 발흥한 역사는 꽤 길다. 시작은 1960년대 후반에 출현한 프랑스의 뉴라이트(Nouvelle Droite)다. 19... -
에디터의 창
아이들을 실험용 쥐로 만드는 교육당국의 무책임함
3월 한 초등학교 교실. 교사는 각자 지급된 태블릿 PC로 학생들에게 영어 학습을 시켰다. 아이들은 각자 아는 만큼 자기 속도에 맞게 답을 누르고 기기가 알려주는 점수에 기뻐하거나 실망했다. 한 아이는 스마트폰 게임하듯 수업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다음 수업은 자신의 수준에 맞게 난이도가 조절된 질문에 답을 하는 식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AI 디지털교과서’가 도입된 학급의 풍경이다.올해 초중고등학교 일부 학년에 AI 디지털교과서가 처음 도입됐다. AI교과서는 종이 교과서를 디지털 기기에 옮겨놓은 기존 ‘디지털교과서’에 생성형 AI를 탑재한 것이다. 교육부는 이 도구와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을 결합해 학생 ‘맞춤형’ 교육을 제공함으로써 학습 격차 해소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교실에 학생 수만큼 보조교사가 생기는 것”이라고 했다. 학생과 학부모, 교사에게 실물을 보여주거나 의사를 확인한 적이 없지만 교육당국의 강력한 추진으로 전국 학교 가운데 3분의 1이나 채택했다.... -
녹색세상
헌재의 시간과 기후의 시간
청소년 기후단체 등이 지금의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법이 국가가 국민과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는 헌법의 원리를 침해한 것인지를 판단해달라며 헌법재판소에 제기한 소송의 판결이 지난해 8월 내려졌다. 헌재는 시행령이 2030년 이후의 감축 목표 기준을 제시하고 있지 않아 온실가스 배출 감축을 지속적으로 담보할 장치가 없다는 이유로 헌법 불합치 판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정부는 2026년 2월까지 새로운 기후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이 판결에 대한 반응은 엇갈렸다. 기후 정책의 책임성이 법률적으로도 다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였고 정부의 감축 목표 강화를 요구할 근거도 추가됐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하지만 헌재는 지금 시행령에 명기된 2030년까지 40% 감축이라는 목표는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기후운동 쪽에서는 이 목표도 근거와 의지가 부족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아쉬운 판결이었다.헌법재판관들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의미 있는 판례를 남기려 노력한 것 같다. 다만...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튀긴 면 하나에 수프 한 봉지. 에걔, 고작 이거냐 싶어도 끓는 물만 부으면 한 끼로 훌륭하다. 텔레비전이 먹통이 되고, 드디어 기사가 오셨다. 대뜸 건장한 기기를 자빠뜨리고, 나사 풀자, 드디어 속이 홀랑 드러났다. 이게 다야? 싸늘한 기판 위에 레고 같은 반도체, 얼기설기 전선들. 거실을 점령한 기기의 실상이다. 같잖게 볼 일은 아니다. 거대하고 복잡한 걸 작고 콤팩트하게 만들려는 게 현대의 문화다. 슥슥삭삭 점검한 뒤 놀랄 틈도 없이 전기를 넣자, 요술처럼 불이 들어오고 미국 대통령이 툭 튀어나왔다.트럼프가 채신머리없이 일론 머스크의 발바닥에 키스하는 사진이 떴다. 교묘하게 둘 다 왼발바닥이다. 물론 가짜 사진이다. 개인적인 역량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머스크는 너무 설친다. 굉장한 머리와 개척자 정신으로 시대의 길목을 지키고 앉아 대박을 노린다. 사업이든 행정이든, 예술까지는 아니더라도 시늉이라도 내야 하는데 막무가내의 효율성만을 따지려 든다. 그의 뉴럴링크는 사람... -
일상 한 그릇
일회용기에 담아 버리는 존엄
연휴 동안 지인의 아파트 단지에서 일어난 일을 들었다. 그가 사는 아파트는 꽤 오래전 지어진 탓에 재활용 쓰레기를 모아두는 공간이 따로 없고, 일주일에 한 번 정해진 시간에만 주차장 한쪽으로 이동식 수거장을 설치해 입주민들의 쓰레기를 거둬 처리한다고 했다. 하필이면 지난 연휴에 재활용 쓰레기 수거일이 겹쳐 2주치 쓰레기를 집 안에 쌓아두고 지내야 했다고 하는데, 쓰레기를 수거해 가는 업체도 휴일은 챙겨야 할 테니 관리사무소나 입주민들 입장도 참 난처하겠다 싶었다. 지인은 그렇게 쓰레기 버리는 날만 벼르며 연휴를 보냈다.그리고 수거 당일 그가 정해진 시간에 맞춰 주차장으로 나섰을 때, 그를 포함한 소수의 사람과 달리 대부분 입주민은 공지된 시간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요일만 마지못해 지키는 척 쓰레기를 주차장 공간에 들이붓듯 꺼내두었다고 한다. 지인은 분개하였으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경비를 서는 노인의 정리 업무를 돕고 캔커피 하나를 사주는 것뿐이었다.나도 19... -
김봉석의 문화유랑
다정함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혐오의 시대다. 여성을, 장애인을, 중국인을, 또 누군가를 타당한 이유 없이, 나의 이익이나 권리를 침해했다면서 일방적으로 조롱하고, 배척하고, 탄압한다. 초유의 일이 아니고 낯설지도 않다. 희생양을 만들어 진짜 악에서 시선을 돌리려는 음모는 인류사에 항상 존재했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가 있었고, 제국주의 일본의 조센징 혐오도 있었다.12일 개봉한 <화이트 버드>는 유대인을 혐오하고 학살한 역사를 그린 영화다. 2017년 개봉해 많은 이들이 감동했던 <원더>의 스핀오프 작품이다. 안면기형으로 태어난 오기는 뒤늦게 학교에 편입한다.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괴롭힘을 당하던 오기는 결국 친구들과 함께 웃음을 되찾는다. 괴롭힘을 주도했던 줄리안은 전학을 간다. 좋은 영화다. ‘다름’을 이유로 차별하고 괴롭히는 행동이 얼마나 그릇된 것임을 잘 보여주었다.<원더>는 해피엔딩이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의 일들은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가 꽤 ... -
사유와 성찰
믿는 것과 아는 것
평소 뜻이 잘 통하는 가까운 지인이 하소연을 쏟아냈다. 평생 교직에 몸담았던 어머니가 어느 순간부터 정치에 관심을 두더니, 극우 성향에 깊이 빠져 가정의 평화를 해치고 있다고 했다. 어머니는 가짜뉴스를 믿고 태극기 집회에 나가 극단적인 주장을 펼쳤다. 걱정이 많은 딸은 어머니와 여러 차례 대화를 시도했다. 어머니가 그렇게 굳게 믿고 있는 선거 부정 같은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어머니는 한마디도 수긍하지 않았다. 딸은 어머니가 평생 구독해 온 보수 성향의 신문이라도 읽어 보고 판단하라고 권했지만, 어머니는 그 신문들조차 이미 ‘종북 좌파’가 됐다며 반박했다.결국 어머니는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극우 유튜브 채널의 신봉자가 되어버렸다. 그곳에서 보고 듣는 사람들의 말을 진실로 받아들였다. 어떤 사안의 사실관계를 면밀히 판단한 후 믿는 것이 아니라 그저 믿을 만한 사람, 혹은 믿고 싶은 사람이 말했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즉, 믿는 것과...